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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설의 '다짐'_조현철 신부 강론2021-02-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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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의 다짐

 



, 죽음을 바라보는 때


입니다. 한가위와 함께 우리의 가장 큰 명절인 설은 기쁜 때지만 동시에 죽음을 바라보는 때이기도 합니다. 앞서간 분들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나의 죽음을 통해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설과 같은 때는 사느라고 정신이 없어 정작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가 도통 없는 우리 시대에 특히 소중합니다. 코로나 재난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반성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실제로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변화가 아니라 적응만 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효율과 수익이 훨씬 중요합니다. 공장과 건설 현장 등에서 사람이 하루 평균 7명씩 죽지만, 우리 사회는 변할 줄 모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런 중대 재해가 일어나도 별문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식으로 할 때 얻는 수익이 더 커서 그렇습니다.

 


,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는 때


설 같은 때, 죽음을 바라보면 평소엔 잊고 살던,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생명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연기는 참 적절한 비유로 들립니다. 천년만년 살 듯 아등바등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덧없음과 삶의 무상함을 절감하도록 합니다. 생명의 덧없음과 삶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우리가 살면서 얻으려고 애쓰는 것도 덧없고 무상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생명의 근원으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 참으로 자유로워질 때


죽음을 바라보며 삶의 근원을 의식하며 살면 나의 행동과 생각이 같아지게 됩니다. 겉과 속이 같아집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누가 나를 보든 말든, 나는 나의 길을 갑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38)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됩니다. 나를 생명과 삶의 근원인 하느님께 묶으면, 진리인 하느님께 순종하면, 다른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31).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직접 보여주신 단 하나의 진리입니다. 사랑할 때, 필요한 상대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집니다. 겉과 속이 다를 때,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신의 속이 드러날까, 항상 신경을 쓰게 됩니다. 노심초사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무언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꾸며야 합니다. 문제는 꾸민 그것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생애, 단 하나의 기억


죽고 나면 자신의 삶 전체에서 단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해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설정입니다. 사망 후 저승으로 가기 전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임시 거처에 머물면서 자신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기억을 골라야 합니다. 하나의 기억입니다. 선택한 사람들은 일주일이 지나면 저승으로 간다. 선택해야만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그 하나의 기억과 함께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단 하나의 기억이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어떤 기억을 고를 것인가? 어떤 기억이 가장 소중한가?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 조종사였던 어떤 남자는 자기가 비행할 때 본 구름의 모습을 선택합니다. 십 대의 여학생은 디즈니랜드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선택을 못 하고, 어떤 이는 선택을 거부합니다. “수도자로서 나에겐 어떤 기억이 남아 있나?” “어떤 순간을 나의 삶 전체로 기억하고 싶은가?” 나를 바라볼 때 부끄럽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그런 물음입니다.

 

자기 삶의 전부가 될 하나의 기억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럴 만한 삶의 순간을 찾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 내 삶도 이만하면 괜찮았구나.” 그 선택은 자기가 살았던 삶을 긍정하면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영화는 아직 살아 있는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가?”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너는 지금 어떤 것에 가장 열중하는가?” “너에게 그 기억 하나만으로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 있는가?”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았을 때, 그런 순간이 있을까? ‘을 택하자니 부끄럽고, ‘을 택하자니 자기 것이 아닙니다. 이도 저도 못 하게 되는, 황당한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살았을 때, 어떤 기억을 선택해도 다른 기억들과 대체로 일관되게 연결될 것이니, 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수도자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을 비우는 삶, 밖으로 쏟아내는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그 초대를 수락한 사람입니다. 수도자는 예수님을 따라 자기 비움에서 오는 참된 내적 자유를 일상의 삶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 때, 겉과 속이 일치하고 하루하루가 여일할 겁니다. 그렇게 살 때, 어느 기억을 선택하든, 그 기억은 다른 많은’(‘모두는 아니겠지만) 기억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의 이름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겠다!” 제 꼴을 볼 때 부끄럽긴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다짐, 설의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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