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제목7월 1일_연중 제13주간 목요일 강론2021-07-01 14:40
작성자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일화는 현대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는 기괴하고 끔찍한 그런 이야기로만 들립니다.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다며 외면하곤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오늘이 아니라 당시의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당시 이 지역의 문화에서는 맏물을 감사와 희생 제물로 풍요의 신에게 바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맏물에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첫 아이를 바치는 이 주제 자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크게 기괴한 그런 사건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하느님의 시험은 제물인 이사악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자손의 번성이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면 하느님의 약속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오늘 이 수수께끼 같은 일화에서 우리가 숙고할만한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느님의 요구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간주하고 우리의 이성에 따른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이런저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예측(expecta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측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더 잘 보호할 대책을 마련해야 하겠다. 그러면 나의 후손이 번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느님의 명을 그대로 실행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입니다. 무모한가요? 엄청나게 무모하게 보입니다. 이제 늘그막에 아들을 하나 보았고, 이 아들을 통해서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는데,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맏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흔할 때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일이 내 삶 속으로도 종종 비집고 들어옵니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큰 불행이 닥쳤다고 하지요. 예를 들면, 큰 병 같은 것입니다. 나는 이 현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완전히 내 통제 밖에 있습니다. 현실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망에 빠지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삶이 온전히 우리 손아귀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신이 아님을 인정할 때,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일이 가능하고 그럴 때 절망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그럴 때 우리에게 희망(hope)’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희망은 이성에 의한 합리적 추론에서 나오는 예측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겸손한 믿음에서 오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새로움에 대한 신뢰입니다. “야훼 이레”(창세 22,14). 답은 하느님이 마련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미 몇 번씩이나 떨어졌습니다. 75살에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많은 나이에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 이사악을 보았습니다. 이사악 자체가 선물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자기 손아귀에 있지 않다는 걸 배웠고, 받아들였고, 하느님께 순종합니다(창세 22,18).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때, 하느님의 자유와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믿음과 희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무참하게 훼손된 오늘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정의·평화·창조(질서)보전(JPIC)을 이야기합니다. 들여다볼수록 정말로 난감한 상황,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성적으로만 따지면, 앞으로 가지나 승산이 없고 그대로 있자니 창조질서 보전을 포기하는, 하느님의 뜻을 포기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이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고, 아브라함의 선택이 우리에게 빛을 비춰줍니다.

 

우리가 할 것은 머리를 써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수도생활, 곧 청빈과 정결과 순명 그리고 기도와 공동생활을 통해서 훼손된 창조질서를 회복하라는, JPIC를 보전하라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희망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예측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만이 우리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예수회 조현철 신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