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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15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7-2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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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오늘 복음 바로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마태 12,9-14). 그걸 본 바리사이들이 이제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안식일 법은 유다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계명으로 사회 질서의 근간을 형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가혹합니다. “안식일에 일을 한 자는 누구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기 31:15). 안식일 준수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준수에 관한 당시의 통념을 깨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격렬하게 반응했던 이유입니다. “에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예수님도 이들의 움직임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신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2). 그래서 피신해 있는 중에도 찾아오는 아픈 사람들을 안식일에 상관없이 모두 고쳐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서도 쉽게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피신한 곳에서도 위험은 여전했습니다. 당신을, 당신이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는 것은 위험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엄중히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만큼 위험을 절박하게 느끼셨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 해치려는 힘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정말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위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게 마련인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격려입니다.




716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합니다. 그걸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답변은 바리사이들이 제기한 비판의 논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 자체가 아니라 안식일에 뜯어 먹었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는 안식일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도 사제만 먹을 수 있는 제사 빵을 먹었다고만 대답합니다.

 

이걸 보면, 예수님과 바리사이의 이 논쟁적 대화는 원래 안식일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밭은 다른 사람 소유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먹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밭에서 주인 허락도 없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을 문제 삼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안식일준수를 둘러싼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굶주린 예수님의 제자들은 허기를 면하려고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 문제는 그 밭이 남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도둑질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비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도 배가 고팠을 때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을 수 없는 제사 빵을 먹었지 않느냐. 다시 말해서, 굶주림 같이 비상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유지하려는 행위는 법을 비롯한 모든 사회 규범에 앞선다는 겁니다. 초대 교부들의 소유권에 관한 주장도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당신이 여분의 음식과 옷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 굶주리고 헐벗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여분의 음식과 옷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이다. 아니 당신은 그 사람의 몫을 훔친 것이다. 돌려주라.”

 

다시 안식일에 초점을 맞추면, 굶주림이라는 삶의 기본 문제는 신론(하느님 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비판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근거로 안식일 계명을 내세웁니다. 어떤 경우에도, 설사 굶주린다고 해도, 하느님의 명령인 안식일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믿는 하느님이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바리사이들의 하느님에게는 사람보다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바리사이의 신론에 맞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론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리는 사람이 자신의 허기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는 것을 금하는 어떤 법이나 관습도 하느님의 뜻에 반한다는 겁니다. 안식일 계명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호세아 예언자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믿는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한 마디로 보여줍니다.

 

자문해봐야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와 신론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과 바리사이들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715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예수님은 안식은 배워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은 휴식과 동일한 것도, 그저 일하는 것의 반대도 아닙니다.

 

안식의 히브리어 샤바트의 어원은 멈춘다는 뜻입니다. 안식은 하느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좋았다 하셨던 바로 그때입니다. 보시니 좋았다는 것은 창조 행위를 멈추고 곰곰이 바라보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안식은 관상하는 안식입니다(<찬미받으소서> 237).

 

안식은 매일 우리가 바쁘게 하는 일을 멈추는 때입니다. 달리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것도 멈추면 보입니다. 안식은 멈추어 서서 내 삶을 바라보고 성찰하는 때입니다. 안식은 길에서 뒤처지거나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없는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는 자연은 어떤지,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때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파라오에게 가서 히브리인들이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탈출 3,18). 설사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파라오는 최소한 일주일이 걸리는 이 여정을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파라오의 양식 저장 성읍 건설에 필요한 진흙 벽돌을 만드는 노동에 동원되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계속해서 일해야 합니다. 하루도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의 소비 사회도 멈출 줄 모릅니다. 멈출 줄 모르는 사회에서 자라나고 길든 우리 대부분도 멈추어 서는 것에 낯설어합니다. 아니, 남들에게 뒤처질까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서 비롯됩니다. 자본주의는 성장 기반 경제입니다. 필사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체제이며 성장하지 못하면 실업과 도산하는 기업이 늘어나 사회가 불안정해집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정부는 모두 필사적으로 성장을 추구합니다. 성장하면 사회가 안정되고 세금도 더 많이 들어오니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탄소중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는 기후위기의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에 휴먼 뉴딜이 추가되었고, 투입 예산은 160조원에서 220조원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은 경제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성장하려면 생산을 늘려야 하고 그러려면 소비를 늘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늘어나서가 아니라 성장하려고 생산과 소비를 늘린다는 것입니다. 성장이 수단에서 목표로 변했습니다. 무엇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성장입니다. 지속적 경제 성장은 우리의 필요와 상관없이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확대를 뜻합니다. 쓰레기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멈춤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안식도 없습니다. 안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의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가 왜 이렇게 혼돈에 빠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는 멈출 수 없습니다.

 

나에게 오너라” “나에게 배워라.”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장 사회의 흐름과 결별하라는 요구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와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끝없는 성장을 통해 자기 확장만을 꾀하는 자본의 운동은 온유하고 겸손한 것이 아니라 오만할 뿐입니다. 그 흐름 속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자본과 성장의 미친 흐름을 제어할 때만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714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모세에게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자기소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르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부활 논쟁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신 후,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풀이하십니다(마르 12,27).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을 실마리로 생각해봅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을 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는 이사악이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악의 하느님입니다. 이사악이 죽었을 때는 야곱이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자기소개는 여기서 끝나지만, 계속 이어갈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는 요셉이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하느님입니다. 요셉이 죽었을 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은 출애굽의 하느님, 곧 해방의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계속하면, 오늘은 우리의 하느님, 내일은 우리 미래 세대의 하느님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죽은 이들은 이 세상에 없지만, 산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세상과 무관하겠지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곧 산 이들의 하느님은 이 세상에 현존하시며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파라오에게 가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양치기였습니다. 그것도 자기 양이 아니라 장인의 양을 치는 양치기였습니다(탈출 3,1).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는 거대한 이집트 제국의 황제 파라오입니다. 모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첫째,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겁니다. 하느님의 제안은 사람의 계산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도대체 게임이 되질 않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라고 했던 모세의 심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탈출 3,11). 이것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지혜롭다는 자들, 슬기롭다는 자들”(마태 11,25),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이 내리는 합리적인 예측(expectation)입니다. 합리적인 예측이지만, 이렇게 되면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파라오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변화의 기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택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 엠마누엘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철부지들”(마태 11,25)의 선택입니다. 신뢰는 희망(hope)을 낳습니다. 그리고 희망은 예측과 다릅니다. 양치기 모세는 철부지의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생긴 희망으로 막강한 제국의 황제 파라오에게 갑니다. 합리적인 예측으로 보면 성공할 가능성은 없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변화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나머지는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이 하십니다.

우리 수도자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다양하고 거대한 을 체험하고 느낍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우리가 합리적인 예측에 따라 행동하면 하느님의 뜻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때가 많을 겁니다. 우리와 비교해 너무나 거대한 그 에 압도당해 묵인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종종 암묵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비롯되는 희망에 따라 행동하면 우리는 미약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고 할 수 있는 한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통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서 힘차게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놓는 것, 비우는 겁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 손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거기서 길어낸 희망으로 하느님의 협조자가 됩니다.




713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모세라는 이름은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뜻을 지녔다고 합니다(탈출 2,10). 그 이름에 걸맞게 모세는 나중에 하느님의 도움으로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의 억압과 착취에서 건져 내는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출애굽 사건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권에서 그렇듯이, 성경에서도 이름 짓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 보면 이름 짓기는 하느님 창조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름 짓기는 신성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창세 1,5.8.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름 짓는 일, 곧 당신의 창조 활동에 사람을 참여시킵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시면 사람이 그 동물의 이름을 짓습니다(창세 2,19-20). 그러니까 이름 짓기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람의 특권이자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는 막중한 일입니다.

 

이름 짓기만이 아니라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자 더러운 영의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더러운 영이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마르 5,9) 정확한 호명은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는 행위이고, 그렇게 할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이름을 왜곡해서 짓고, 그렇게 지은 이름으로 무언가를 감추려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대개 개인과 집단의 이권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타락합니다. 일본은 후쿠시마의 방사능 핵연료 오염수처리수라고 부릅니다. 처리된 물이라서 방류해도 괜찮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도 일본 못지않습니다. 얼마 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위험 요소가 해소되지 않는 핵발전소 신한울 1호기 운영을 조건부 승인했습니다. 위험 요소가 있지만 운영이 계속 지체되면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것입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실상 원자력경제위원회, 원자력진흥위원회의 다른 이름입니다.

 

‘4대강 재자연화를 한다고 했지만, 전체 16개 보 중에서 5개의 보만 건드렸습니다. 2개 보 해체(세종보, 죽산보), 1개 보 부분 해체(공주보), 2개 보 상시 개방(백제보, 승촌보)만 결정하고 시행 시기는 결정도 못 했습니다. 가장 보가 많은 낙동강은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산림청이 내놓은 2050 탄소중립 추진 전략인 ‘30억 그루 나무 심기는 적어도 15억 그루의 나무 베기를 감추고 있습니다. 작년에 10만명의 국민청원으로 시작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기업이란 말이 빠진 채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고,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고 커서 중대 재해가 발생해도 거의 처벌이 불가능한 법이 되었습니다. 태양광발전과 풍력발전이라는 재생가능에너지가 돈이 된다고 몰리고 있는 산과 농지와 바다가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논의하는 탄소중립기본법에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던 녹색 성장이란 이름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녹색성장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탄소배출 증가를 감춥니다.

 

예수님은 기적의 표징을 보고도 변할 줄 모르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티로와 시돈과 소돔보다 더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사회적, 생태적 위기보다 더 분명한 표징이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짓 이름 짓기로 아까운 시간과 생명만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탄하신 것처럼 안타깝지만 지금도 세상이 변화할 가능성은 정치와 경제 권력에서는 ‘0’에 가깝습니다. 사람들도 많이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수도자는 지금의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과 다른 질서,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창조질서를 따라, 그 질서를 지키며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조질서를 왜곡하고 감추는 거짓 이름들을 단호하게 밝히고 진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우리의 이름 수도자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과제와 도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712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4-36). 굉장히 듣기 힘든 말, 알아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강도를 계속 더 높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기도 해서 말씀의 톤을 누그러뜨리려고 이런저런 해석을 해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아마 로마 제국을 뜻하겠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사랑하셨겠지만, 로마 황제라는 권력이 만들어 놓은 세상과는 불화했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힘으로 평화를 만드는 로마 제국은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체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요구한다는 선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권력 관계, 힘의 관계에 놓여 있는 부자, 모녀, 고부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거기에도 억압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 그런 질서에 매달리면 나와 함께 갈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품었을 새로운 질서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독서에서, 이집트에서 평온하게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곤경에 빠집니다. 요셉 때부터 이집트에서 살아오던 이스라엘 자손이 평온한 삶을 누려왔던 것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들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곧 그들이 베풀어준 환대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 환대를 철회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은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후손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환대는 우리가 세상에서 평온하고 안정되게 살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줬다가 뺏었다 하는 그런 환대, 조건부 환대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지에서 보듯이 삶은 항상 불안정해지고 평화는 없습니다. 삶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려면 절대적 환대가 필요합니다. 베푸는 사람이 맘대로 철회할 수 없는 환대입니다. 환대는 고맙게 받아야 할 선물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환대가 없으면 사회에서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인 이상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회의 환대를 받았다는 뜻이지요. 환대는 각자가 사회의 성원이 될 수 있게, 사회에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의 성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이 사회에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의 환대 덕분일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무상의 환대, 대가 없는 환대를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환대를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부한다고 해도 이 환대는 철회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절대적 환대를 베푸시고 우리는 모두 이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에게 절대적 환대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이 절대적 환대를 인정하는 세상이 예수님이 바라신 세상, 예수님이 원하신 질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조건부 환대, 그것도 매우 이기적인 조건부 환대만을 허용하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절대적 환대는 생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여전히 절대적 환대를 찾기 어려운 현실, 여전히 절대적 환대가 필요한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우리 수도자의 서원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가난, 정결, 순명의 수도서원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줄이고 비움으로써 다른 사람이 삶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수도서원의 삶은 궁극적으로 자기 비움의 삶, 케노시스(κένωσις)의 삶을 지향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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