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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16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7-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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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오늘 독서는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탈출 24,3-8). 하느님은 이미 노아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고 그래서 우리 신앙에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수도자로 함께 살아가는 데도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계약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계약이 공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정한 계약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보험 같은 것을 계약할 때나 인터넷 거래를 할 때, ‘약관이나 동의 사항에 서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잘 읽어보지 않고 서명합니다. 이 부분 자체가 잘 읽어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약관이라는 것을 보면 아주 자잘한 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이것을 ‘small print’라고 합니다. 분량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약관을 읽을 엄두가 잘 나지 않습니다. 읽을 마음이 들지 않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보통 때는 괜찮지만, 분쟁이 생기면 계약을 만든 쪽에 유리한 조항들이 등장해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잦은 택배 노동자 사망 사고와 물류 창고 화재로 물의를 일으키는 인터넷 쇼핑몰 쿠팡에는 아이템 위너(item winner)’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동일 상품인 경우, 최저가를 내놓은 판매자가 아이템 위너가 됩니다. 아이템 위너가 되면 이전의 다른 판매자가 만들어 놓은 상품 이미지, 상품 댓글 등을 아무런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격만 낮추면 이전에 다른 판매자가 공들여 쌓아 놓은 것을 몽땅 가지고 갑니다. 판매자 간에 출혈 경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쿠팡은 물건이 더 잘 팔리니 이익입니다. 당하는 쪽에선 황당합니다. 이 규정으로 피해를 본 판매자가 쿠팡에 항의합니다. 그때 쿠팡은 약관을 보여줍니다. 약관에는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없게 정교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치밀하게 의도한 것이지요. 피해 판매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사기성이 농후합니다. 피해가 잇달자 얼마 전 참여연대가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했고 며칠 전 일부는 시정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제도는 살아 있고 피해도 당분간 계속될 겁니다.

 

이렇게 보면, 계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서로가 계약의 내용을 충분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발적으로 동의를 해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계약이 그렇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3) 모세는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7) 모세가 하느님과 맺을 계약의 내용을 백성에게 다 들려주고 나서 백성들이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충분한 소통이 있고 나서야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일단 계약이 체결되면 하느님은 계약에 당신을 묶습니다. 계약에 충실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 계약을 위반해도 돌아오기만 하면 계약은 다시 성립합니다. 상대에 관대하십니다. 계약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은 충실하고 관대하십니다.

 

똑같은 계약이지만 그 결과는 판이합니다. 쿠팡의 계약은 사람을 죽이고 하느님의 계약은 사람을 살립니다.




723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십계명 전문은 탈출기 20장과 신명기 5, 이렇게 두 번 나옵니다. 십계명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계명이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나이 광야에서 주어졌다는 역사적 맥락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 십계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출애굽의 하느님으로 소개하는 것은 십계명 이해에 이집트라는 맥락이 중요하다는 암시입니다.

 

이집트는 정점에 파라오가 있고 그 파라오가 백성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제국입니다. 제국의 질서는 지배와 복종입니다. 이집트 제국에서 히브리인들을 끌어낸 하느님은 첫 번째 계명으로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다른 신은 이집트 신, 파라오가 섬기는 신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집트의 신은 파라오가 통치하는 제국의 질서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신, 일종의 제국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습니다. 신이 파라오와 제국을 섬기는 겁니다. 가짜 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집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 번째 계명을 단순히 종교적 차원의 유일신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입니다. 첫 번째 계명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새로운 땅에서 세울 나라는 이집트의 신이 정당화하는 질서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해방의 사건, 출애굽으로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그런 사회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질서에 기초한 나라를 세우라는, 또 다른 이집트를 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 계명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세울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입니다. 십계명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식일 계명이 중요하지만, 십계명 모두가 새로운 나라의 전망과 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전망에 따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사회, 경제, 정치적 차원은 종교적 차원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십계명으로 하느님이 바라는 사회입니다.




7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독서인 아가본문에 달린 <성경>의 소제목은 애인을 찾아입니다. 사실 표현만 그대로 보면, <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인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열병에 걸려 아침부터 밤까지 애인을 찾아다니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런 <아가>가 어떻게 히브리의 경전(그리스도인에게는 구약성경’)의 일부가 되었을까? 경전에 대한 우리의 통념, 곧 성스러움과 엄숙함 등에 비추어 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읽기 어려운 책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하느님의 계시라는 성경의 맥락에서 읽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대개는 이솝 우화처럼 알레고리(풍유)’로 읽어냅니다. <아가>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어색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냥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로 보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아가>가 정말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책이라면, 그리고 바로 그런 책으로써 정경에 채택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하느님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경전과 종교와 신성함 등에 대한 우리의 태도, 곧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어떤 선입견, 편협함, 경직성 등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어떤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도 굳이 이 <아가> 본문을 축일 미사에 사용했습니다. <요한복음>도 그럴싸한 맥락에서 마리아를 묘사합니다. 마리아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에 남아서 울고 있습니다. 빈 무덤에서 떠나질 못합니다. 정원지기로 생각한 예수님에게 호소하는 마리아에게서는 짙은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예수님은 어땠을까?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막달레나를 물리치지 않았다는 것은 압니다. 막달레나의 그런 마음을 허락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어디 가서 이렇게 말하면 스캔들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사신 바로 그분이라면, 이런 추측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다는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와 그렇게 사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예수님도 온전히 느끼셨습니다.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엾은 마음이 들었고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울었던 예수님입니다. 왜 유독 연인 사이의 감정만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감정여기서는 남녀 간의 사랑은 하느님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속할 수 없다고 배제하는 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하느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하는 ’, 알게 모르게 그리스 철학에서 퍼져나온 관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스 사상은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서 성경의 관점과 섞여 있는 수가 많습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신의 첫 번째 속성은 불변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포함한 감정은 변화를 뜻하는 열등한 것입니다. 인간과 신의 속성은 서로 배타적이라고,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신성은 정확히 예수님의 인성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 사람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사랑으로 사도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도들에게 알린 사도 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제대로만 사용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좋은 것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721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충분함과 적절함과 한계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도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니 많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원 플러스 원이 먹히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창고에 옷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수도 많습니다. 소비사회의 특징입니다.

 

급하게 이집트를 빠져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에서의 삶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없는 것이 많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집트가 그립다고 불평합니다. 그렇지만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이집트에서의 삶이 편했을 리 없습니다. 현재가 고달플 때 과거가 마냥 좋아 보이는 일종의 착시 현상일 뿐입니다. “,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라고 한탄합니다(탈출 16,3). 하지만 가만히 보면 고기를 먹은 것도 아닙니다. 고기 냄비 곁에 앉아서 빵을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과거의 모든 것이 그리워지고, 마치 고기를 먹은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하늘에서 양식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나중에 이 양식을 만나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를 주는 데 조건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탈출 16.5). 첫째, “비처럼 내려 줄것이다. 하지만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여라.” 비가 오듯이 넘치게 많이 주겠지만, 그날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으로 충분하니, 쟁여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엿샛날에는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이렛날인 안식일에는 양식을 거두어들이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충분함과 한계의 감각 그리고 멈춤의 필요성을 배우는 감각을 기르는 시간과 계기였습니다. 이집트 제국은 충분함과 한계를 모릅니다. 파라오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일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거두어들입니다. 만나는 이집트처럼 비대해지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의 를 뿌려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것은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 쉬지 않고 조금 더’ ‘더 많이를 외치는 오늘의 소비사회에서, 하느님의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찬미받으소서> 222),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 “작은 것이 크다는 확신을 지니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행복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약속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서원이 지향하는 삶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수도서원을 마음에 새겼으면 합니다, 소중하게, 사랑스럽게.




720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오늘 독서는 출애굽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탈출 14,21-15,1).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백삼십 년을 살았던 이집트 땅을 탈출했습니다. 그들은 옛 삶을 떨치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필요했던 많은 이국인들도 함께 떠났습니다(탈출 12,38). 새로움을 찾아 나선 이 탈출은 한 마디로 건너감입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실제로 물리적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익숙해 있던 이집트 제국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이집트 제국 체제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답이 없었습니다. 쉽진 않지만, 이집트를 떠나 바다를 건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정말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무한 경쟁, 승자독식, 불공정 노동, 젠더를 비롯한 각종 차별, 청년의 절망, 부동산 갈등, 자살과 단산, 정신적 질병, 기후재난을 비롯한 각종 생태적 붕괴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문제들이지만 전부 엮여 있습니다. 실타래가 꼬일 대로 꼬여서 한 가닥씩 풀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안경이 아니라 가위나 칼이 필요합니다. 엉킨 실타래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널 때 이들은 이전의 삶을 끊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 건너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지금 당면한 여러 문제의 시작은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산업문명의 틀(패러다임) 안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4차 산업혁명 운운하지만, 이것도 결국 산업문명의 틀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문명, 이른바 생태문명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황당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현재의 틀 안에서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른 틀로 건너가려면 우리의 사고방식부터 확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온 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결단은 쉽지 않지만, 결행 후에도 여전히 힘듭니다. 모든 근원적 전환에는 언제나 반동이 있습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는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망,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질서로 건너오라고말씀하십니다.

 

다시, ‘수도자를 생각해봅니다. 우리 수도자가 수도자로 산다면, 우리는 이미 오늘의 현실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질서로 건너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수도서원으로 약속한 삶은 오늘의 현실이 부추기는 삶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하는, 그래서 계속해서 소비를 늘려야 하는, 소비사회의 삶의 정반대 편에 있습니다. 이 삶은 오늘 하느님이 바라시고 예수님이 부르시는 미래입니다. 우리의 삶이 오래된 미래이어야 합니다.




719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몇 년 전부터, 여름이 다가오면 뭔가 좀 불안해집니다. “올해 더위는 어떨까? 홍수는? 태풍은?” 어젯밤엔 갑자기 돌풍을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대중매체도 관련 뉴스를 쏟아냅니다. 2018년에는 기록적 폭염, 작년에는 기록적 폭우가 있었지요. 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기록적인 폭염과 산불이 거의 정례화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랍니다. 심정적으로야 누구나 그렇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일 년만 살 것처럼, 우리만 살 것처럼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가 무엇의 결과로 일어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문제에만 관심을 두지 그 문제가 가리키는 것, 문제의 원인과 그 의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길한 말이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기후재앙은 이미 시작이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보다 분명한 표징은 없습니다. 분명히 뭔가 바뀌고 있습니다. 어젯밤의 소나기만 해도 이전의 소나기와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체로 아직 한가합니다. “아직 망한 건 아니잖아?” 대충 이런 식으로 뭉개며 표징을 외면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미 표징은 넘치도록 주어졌습니다(마태 12,38-42). 자기 꿍꿍이속과 자기 이권이 표징이 상충하면 사람들은 대개 표징이 말하는 것을 외면합니다. 이렇게 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렇게 해서 완고해집니다. 사람은 얼마나 완고해질 수 있을까요? 어떤 면에서 삶은 죽음의 표징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고, 죽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삶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것보다 분명한 표징은 없지만, 이것만큼 무시당하는 표징도 없습니다. 이 표징을 제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겠지요.

 

누가 변화에 가장 굼뜰까요? 현재의 질서에서 이득을 보는 쪽입니다. 변화를 가져올 가장 큰 힘을 지닌 정치 권력도 거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권은 언제나 현재의 질서, 현재 상태를 유지하길 원하고 변화를 꺼립니다. 변화를 시도한다고 해봐야 어떻게든 지금까지 해오던 틀 안에서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좋은 정권과 나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정권 자체의 속성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변화는 기득권의 변화, 해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정치 권력에 제대로 된 변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표징을 표징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맞게 변화하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에서 특히 수도자의 존재 이유와 존재 의의가 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수도자가 수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오늘 이 시대의 표징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소비문화가 부추기는 삶을 거부하고, 표징이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수도서원으로 선택한 삶이 바로 그런 삶이기 때문입니다.


 


718일 연중 제16주일

 

오늘 미사 독서를 보면, 예레미야 예언서는 거짓 목자와 악한 목자들을 비판하고 마르코 복음서는 참된 목자와 선한 목자를 보여줍니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예레 23,2). 예레미야의 눈에 비친 자칭 목자라는 이들의 행태입니다. 목자라면서 양 떼에 관심을 기울여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찮다고 쫓아냅니다.

 

최근 우연히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소식지에서 해외 신자가 쓴 해외 사목, 이건 정말 아닙니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요약하면, 해외 사목을 오는 일부 사제들이 명품 등 최고급품만 사용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고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의 관심, 곧 밖을 주의 깊게 살피는 마음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자기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에만 몰두하지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 했던 영적 세속화로 이어집니다. 영적 세속화는 자기 몰두로 시작합니다. 교회의 사업은 번창할 모르지만,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 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사제가 귀한 시대에 해외에서 한국 사제는 더욱 귀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의사의 수가 부족하다고 하여 돌팔이가 세상에 나가 의술을 펼치게 하고 사람을 수술시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한 비판입니다. 글은 교회 지도자의 책임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스승이 강직하고 올바로 지도하면, 제자는 결코 방황하지 않습니다.” 뼈아픈 지적입니다. 해외 사목하는 일부 사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각종 소임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직분을 받은 모든 사제와 수도자에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목자,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필요에 관대하게 응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기간은 몰라도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하면 쉬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소임을 마치고 돌아온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꼭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이 방해를 받는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외딴곳으로 떠나가지만, 사람들이 쫓아옵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단 쉬러 왔으니, 먼저 쉬고 나서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합리적입니다. 문제는 합리적인 방식에 익숙해지면 사목이 세상의 일반 업무와 비슷하게 된다는 겁니다.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만 업무 처리하듯이 일을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향이 상당히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잘못하면 예레미야가 비판한 거짓 목자, 악한 목자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쉬러 왔지만 필요가 생기면 바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쉼을 일단 접고 찾아온 군중을 만납니다. 헌신적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완전히 지쳐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둘째 방식을 지속하려면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신 마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가엾은 마음(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은 창자/애를 뜻하는 그리스어 σπλγχνον스플랑크논에서 왔습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애끊는 마음, 애간장이 타는 그런 마음입니다. 가엾은 마음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님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길에 쓰러진 유다인을 보고 느꼈던 마음도 바로 이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영어로는 대개 compassion으로 번역합니다. com(함께)passion(고통)의 합성어로 상대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의 고통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상대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마음은 관심, 상대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생겨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서 그를 보고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7년 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우리 각자는 이런저런 경우에 가엾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낄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일단 그런 마음이 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자신을 비우고 상대의 필요에 응답하게 만듭니다. 참된 목자, 선한 목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코로나 초기, 고립된 이웃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한 교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도 있고 일반 신자들도 있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의 심정에 함께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움직였습니다. “가엾은 마음의 힘으로 우리는 참된 목자, 착한 목자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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