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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17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7-2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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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교회 안에서 성 이냐시오하면 대개 영신수련예수회를 떠올립니다. ‘영신수련은 무엇보다 생활양식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올바른 선택을 위한 피정입니다. 이냐시오가 제시하는 올바른 선택을 위한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Imitatio Christi)’입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을 한 사람이 복음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길,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처럼 선택하기를 바랐습니다.

 

4주간(4부분)으로 구성된 영신수련의 2/3/4 주간은 각각 예수의 삶,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 영신수련은 압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수련입니다. 이 기간의 복음 묵상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체계적인 훈련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만드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인 질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 아는 데 중요한 두 가지는 그 사람의 인간관계와 그 사람의 관심사입니다. “누가 그 사람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는가?” “그 사람은 무엇에 가장 열중, 헌신했는가?”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기초로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도 구체성과 현실성을 지니고 나타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 말고 다른 식으로 예수님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희년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 당신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사 61,1-2; 58,6 참조).

 

여기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희년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희년의 실현에 헌신했습니다. 희년의 실현이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희년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관심은 주님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마태 6,9-13). 한 마디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기도이며 동시에 희년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전반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후반부는 희년의 실현에 관한 것입니다. 전반부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는 것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 나라의 동의어입니다. “아버지의 나라”, 곧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라는 것입니다. 후반부에 나오는 잘못ovfeilh,ma(오페일레마)금전적 채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용서하다라는 avfi,hmi(아피에미)는 예수님이 자주 사용한 동사로 면제하다, 내보내다, 해방하다, 탕감하다등을 뜻하고 희년과 관련된 맥락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요컨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기도이며 희년 기도입니다. 그리고 희년의 실현이 곧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은 빚 탕감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여 평등사회, 대동사회를 실현하는 희년의 대의에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희년의 실현에 헌신할수록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에서 희년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영신수련으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많아지길 바랐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에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여정이길 바랍니다.




7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언제부턴가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일종의 선입견, 고정관념에 해당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만 찾아서 보고 읽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 의견을 더 강고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새로운 의견, 관점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갈등 해결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진영 논리가 강화됩니다. 상대는 내가 싸워서 타도해야 할 적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아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일종의 확증편향에 해당합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어릴 적 예수가 전부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고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마태 13,55) ‘목수와 마리아라는 시골 아낙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결정합니다. 예수 자신의 성장에서 오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만 생각해봐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일정한 크기 이하의 것, 특정한 성질의 물질은 볼 수 없습니다. 분자, 원자, 전자, 핵은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파동은 볼 수 없지만, 있습니다. 에너지는 볼 수 없지만,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이 전부라는 것은 억지입니다. 우리는 일정한 주파수 내의 소리만 들을 수 있습니다. 가청 주파수 밖의 주파수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돌고래와 박쥐 등 일부 동물의 가청 주파수는 사람보다 훨씬 넓습니다. 내가 듣는 것만이 전부라는 것은 억지입니다.

 

이런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확증편향은 누구나 자주 빠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하면 편합니다. 내게 익숙한 것만 보고 들으면 됩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려면 열린 마음, 개방성이 요구됩니다. 자신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귀찮습니다.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개방성이 줄어들고 완고해지기 쉽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지 않으셨다.”(마태 13,58)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이 마을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은 표현이 조금 다른데, 그 차이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6) 예수님은 하시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기적으로 일으키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사명의 핵심적 실천 과제였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과 완고함이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는 우리에게 겸손한 개방성은 너무도 중요한 사도적 태도입니다.





729일 연중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아는 것과 하는 것, 인식과 행동/실천은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습니다. 행동/실천에는 인식론적 차원이 있습니다. 행동/실천이 인식에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아는 것은 대개는 행동/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악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악기를 다루려고 하면, 먼저 그 악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힙니다. 그렇게 악기를 알고 나서(인식) 악기를 연주해봅니다(행동).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연주하면서(행동) 악기를 조금씩 더 알게 됩니다(인식). 농사를 생각하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농사가 무엇인지 책에서 알 수도 있지만(인식), 결국은 직접 해봐야(행동) 농사가 무엇인지 압니다(인식). 사랑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해보지 않으면(행동) 사랑이 무엇인지 아무리 공부해도 알 수 없습니다(인식).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이 명제의 진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명제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낳아보면 자신을 온전히 나에게 맡기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그런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도 있지만, 회피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봐야 더 잘 보입니다.”(<어린 왕자>) 사랑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 사랑이시라고 알려줍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오빠에 대한 사랑의 간절함에서 나오는 확신 또는 절교로 다가옵니다. 마르타의 간절한 사랑이 사랑 자체이신 분과 만납니다. 마르타는 그렇게 사랑의 하느님을, 육화하신 사랑의 하느님을 알아보았습니다.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기회비용’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이 다양한 기회를 모두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 돈, 능력 등 자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의 선택은 다른 기회들의 포기를 뜻합니다. 기회비용은 어느 하나를 선택할 때 포기하는 다른 기회의 가치입니다. ‘이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 만한 비용을 치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기회비용의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보물과 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서 그것을 얻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팔고, 처분한다는 얘기는 포기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가진 채 보물이나 진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보물이나 진주를 얻으려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저걸 얻을 수 있는데, 할 수 있는데, 누릴 수 있는데, 그걸 포기 하고, 이걸 선택하는 겁니다. 기회비용입니다.


수도자인 우리는 수도생활을 선택하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포기했나? ‘전적인 포기’ 같은 말은 너무 거창하고 모호합니다. 다 포기했다는 것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수도생활의 기회비용을 생각해보는 것이 수도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혼인생활을 포기하고 수도생활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 혼인생활이 기회비용인 셈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두리뭉실하고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또 요즘은 수도생활이 아니라도 혼자 사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구체적인 포기와 관련해서 얼마 전에 들었던 어느 수녀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수녀님은 수녀회에서 하는 그룹홈 형태의 보육원에서 소임을 했습니다. 상당한 기간 한 가정의 ‘엄마’로 살았습니다. 아기와 아이들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키우면서 무척 힘들었지만 무척 기뻤습니다. 후일 돌아보니 바로 그때가 자기 수도생활의 황금기였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던 어느 날 문득 자기가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이전에는 혼인생활을 포기하고 수도생활을 선택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기쁘고 보람이 있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수도생활을 택했는데, 그렇게 택한 수도자의 삶을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이후 수녀 님의 삶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소중합니다. 그 수녀님이 그토록 소중한 삶의 어떤 가능성을 포기하고 수도생활을 택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의 삶을 위해 소중한 어떤 것을 포기했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해서 얻은 “보물”과 “진주”, 수 도자의 삶을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7 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복음 비유 예수님 상상력, 자유로움, 파격 보여줍니다( 13,31-33).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래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 당연히 하느님 나라는 창대하고 위세는 하늘을 찔러야 합니다. 당시의 이러한 통념과 달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자라납니다. 하느 나라 우리 생각 뛰어넘 신비라는 겁니다. 식물을 길러보면 느끼겠지만, 씨는 사람이 뿌리지만 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신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룩을 나쁜 의미, ‘악의 상징’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누룩이 밀가루 발효시켜 부풀 만드 나가 것으 생각 듯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하지만 예수님은 누룩을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도 사용합니다. 하느님 나라 키우 력으로 생각합니다. 누룩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자유롭습니다. 누룩을 부풀리는 힘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것을 부풀리냐에 하느 나라 퍼져나 있습니다. 자체로 나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상상력과 자유로움과 파격을 함께 보여주는 것은 누룩을 집어넣는 사람입니. “어 여자”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당시로는 파격 자체입니다. 당시의 문학작품에 여자로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여자는 일종의 ‘없는 존재’일 만큼 남성 중심 가부 문화였습니다. 여자 남성 소유물 여겼습니. 복음에 나오듯, 남자는 이혼장이라는 종이 쪼가리 하나로 여자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선 자체 파격입니다. 성경에 여성들 중요 인물 등장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와’와 ‘마리아’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하느 나라의 비유 이야기에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킵니다. 더구나 느님 나라를 밀가루에 누룩을 넣는 , 먹을 것을 마련하 , 당시에는 여자만이 일로 비유합니다. 정말 파격입니다. 비유는 예수님이 실제로 여성을 다르게 보고 대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더해줍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식, 그렇게 세상을 뒤흔들어 진정으로 평등한 세계를 만들려는 관점과 운동이 페미니즘이라면, 예수님 진정 페미니스트입니다. 자신 과시하 파격 니 라 그 상황에 꼭 필요한 파격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너무나 경직되고 협소한 시각이 성직자, 수도자 물론이 신자들 지배하 경우 많습니다. 우리 달랐으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상상력, 자유로움, 파격을 청해봅니다.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어떤 빵이 세상을 바꾸나 

 

빵이나 쌀과 같은 양식의 문제는 권력문제와 직결됩니다. 201012월의 아랍의 봄도 그 지역의 주식인 밀의 가격 폭등이 발단이었습니다. 밀 수출국인 러시아가 극심한 가뭄을 예상하고 밀 수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밀 가격이 급등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랍 지역의 봉기는 기후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먹을 것을 공급하는 능력은 권력의 존폐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장정만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을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게 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다시 물러가셨다”(요한 6,15). 예수님은 정치적 권력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권력과 관련된 빵 이야기는 복음의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40일 단식을 마친 후의 유혹 이야기에도 빵이 등장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 이 유혹은 단지 예수님 개인의 배고픔과 관련한 유혹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40일을 굶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시장했을지는 몰라도사실 40일 단식을 하고 나면 시장기를 느끼기보다는 탈진 상태가 됩니다악마가 이미 40일이나 단식한 예수님에게 빵으로 배를 채우라고 유혹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악마의 이 유혹도 권력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합니다. 빵은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든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식량을 무제한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엄청난 권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얻은 엄청난 권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이라고 믿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의 권력은 세상을 정치적으로 장악하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집트 제국도 그랬고, 로마 제국도 그랬고, 미국도 그렇습니다. 힘은 엄청나게 크지만, 세상의 변화와 평화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톨스토이가 국가는 폭력이다라는 글에서 말했듯이, 힘으로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빼앗긴 세력을 계속 감시하고 억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긴장과 억압의 상태는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추대 움직임을 알고 물러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들, 당신이 애써 먹인 사람들을 피한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을까요? ‘성찬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생각을 암시해줍니다. 여기서도 빵이 등장하지만, 이 빵은 권력과 힘이 아닙니다. 이 빵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빵을 주는 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 자기 비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예수님은 권력, 물리적 힘으로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느님 나라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자신을 세상에 내어줄 때, 남을 위해 자기를 비울 때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현실에서 보면 이런 생각은 너무 순진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상의 어떤 권력과 어떤 힘이 세상을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바꾸었는가?” 없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서로 권력을 주고받은 역사입니다. 누구는 권력을 뺏었고 누구는 빼앗겼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세상은 하느님이 원하는 쪽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세상이 얼마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나아졌다면 그것은 자기 비움을 행한 사람들 덕분입니다. 기후위기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어온 세상도 이제 자칫하면 공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위기야말로 권력, 자본 권력의 탓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권력은 세상을 좋게 바꾸지 못합니다. 자기 비움, 자기 헌신의 삶이 그렇게 합니다.

 

세상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럴 때, 세상의 변화는 몰라도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만큼 세상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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