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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19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8-0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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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순교자 기념일

 

예수회에서 많이 쓰는 말 중에 마지스magis’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 큰’ ‘더 많은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예수회의 모토라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에서 더 큰도 마지스에 해당합니다. 마지스에 대조되는 말은 메디움medium(mediocre)’입니다. ‘중간’, ‘평범의 뜻입니다. 마지스는 평범함에서 한 걸음 더 나가려는 태도입니다. “이냐시오의 세계관에는 평범함의 자리는 없다(Mediocrity has no place in Ignatius' world view).” 예수회 총장을 지낸 Peter-Hans Kolvenbach 신부님의 말입니다. 이냐시오와 예수회가 얼마나 마지스를 강조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랑은 마지스다.” 오늘 막시밀리아노 콜베 순교자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사랑은 작은 사랑, 보통 사랑, 큰 사랑, 더 큰 사랑 이렇게 나누어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것이 사랑인 한, 사랑은 언제나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사랑은 어중간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둔 엄마를 생각해봅니다. 엄마는 아기에게 언제나 좀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계속 조금 더 좋은 것을 조금 더 많이 주길 바랍니다. 사랑은 마지스입니다.

-콜베 신부님을 생각해봅니다. 콜베 신부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상태에서 그냥 있어도 되었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 대신 나를!” 하며,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사랑은 마지스입니다.

 

언제나 좀 더 큰 것을 추구하는 마지스 사랑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스인 사랑은 분별 있는 사랑(caritas discreta)이어야 합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좀 더 주려고 하는 것이 정말 아기에게 좋은 것인지 곰곰이 따져봐야 합니다. 아기에게 좀 더 주려고 하는 것이 엄마의 욕구 투사와 충족이 아니라, 정말로 아기에게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여호 24,16). 오늘 독서에서 주님을 섬기겠느냐? 주님을 섬기겠다.”라는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는 것은 야훼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어느 사이 다른 신, 이집트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여호 24,14-29). 사랑의 신이 아니라 지배의 신을 섬기는 겁니다.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스 사랑은 많은 문제를 낳습니다. 이것만 주의하면, ‘마지스 사랑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813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오늘 독서 말씀은 하느님이 말씀하는 형식으로 이스라엘에 관한 하느님의 구원사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해오셨는지 알려줍니다. 신앙은 이렇게 이야기로 전해지는 하느님의 구원사를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다시 말로 전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로 표현되는 신앙은 간결하고 딱딱한 형태의 신앙 조문을 살아 숨 쉬게 만듭니다. 신앙 조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려줍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일에 고백하는 짤막한 사도신경이나 조금 더 길고 딱딱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뒤에는 하느님의 창조부터 오늘의 교회까지 하느님의 구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이 지나면서 간결한 표현, 규정으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규정이 나오게 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면, 규정의 정신을 놓치고 맙니다. 규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알아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규정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규정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규정의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규정의 문자적 표현에 얽매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문자와 표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이런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가 묻습니다. “무엇이든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규정에 따르면 버려도 됩니다. 바리사이는 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대답하십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그러고 나서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신 자신의 해석을 내놓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창조 이야기를 들어서 부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그 본질을 말해줍니다.

 

바리사이는 규정에 계속 얽매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다시 규정을 들어서 말하는 바리사이에게 예수님이 응답합니다. 남자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처음부터(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규정이 나오게 된 배경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수도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가소비녀회의 경우, ‘소비녀라는 현대에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에도 어떤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면 이 이름을 좀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각 수도회의 고유한 규정에도 그것이 생겨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날 때, 보이질 않아서 그렇지 우리는 사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 역사를 모르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 있는 어떤 고유한 행동이나 습관 뒤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알아야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를 많이 모으고, 듣고, 기억하고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우리가 서로 점점 더 깊은 일치로 나가는 길입니다.




812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 시대에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줍니다.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채권자는 채무자를 감옥에 가둘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더 무섭습니다. 세상에 사채보다 무서운 게 없다고 합니다. 급한 불을 끄려고 인 줄 알면서도 빌립니다. 일단 빌리면, 지옥문이 열리는 수가 많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원금을 웃도는 이자, 이자에 이자가 꼬리를 물면서 채무자를 꽁꽁 옭아맵니다. 무엇이든 팔아야 합니다. 심지어 장기도 팔라고 강요합니다. 빚은 삶을 망가뜨립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빚의 탕감은 사람을 살립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안식년, 희년의 빚 탕감도 바로 사람을 살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빚 탕감의 비유도 안식년과 희년의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년과 희년의 빚 탕감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빚을 진 사람이 안식년과 희년의 탕감 규정을 악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종들처럼 빚진 사람은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제발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예수님도 할 수 있는 한 빚을 갚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6). 갚으려고 하는 한, 빚을 빌미로 빚진 사람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이상과 현실이 결합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와 용서를 빚과 탕감에 비유합니다. 살면서 사람 사이에 죄나 잘못은 계속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용서도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 안식년과 희년의 빚 탕감에 비추어보면 여기에도 조건이 하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는 대상이 없는 용서, 허공에 하는 용서, 의미 없는 용서가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한, 죄를 빌미로 죄지은 사람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이상과 현실이 결합한 모습입니다.

 



8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뿌리는 사람, 거두는 사람, 누리는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열매는 반드시 맺는다.” 모세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신명 34,1-12). 돌이켜보면 모세는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구한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히브리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요행히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 사로잡혀 동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지만, 이후 광야에서 평생을 동족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만이 모세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느님의 명에 따라 동족에게 물을 주는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너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 공동체를 불러 모아라. 그런 다음에 저 바위 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민수 20,8).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민수 20,11). 말로만 하지 않고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 내가 이 공동체에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약속의 땅을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뜻과 관련이 있습니다(탈출 2,10). 모세는 자기 동족을 바다를 거쳐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자기 이름값을 했지만, 약속의 땅을 보기만 했지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씨앗을 뿌렸지만, 그 열매를 거두지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신명 34,6).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물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신명 34,7). 모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모르는 곳, 하느님만 아시는 곳으로 훌훌 떠나버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모세의 헌신적인 삶이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열매를 거두었고 그 혜택을 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서우리를 통해서일하십니다. 그것도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성취되어도 겉으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그늘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모세도 너무 아쉬워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답게 모세는 자기도 하느님의 방식으로 평생을 살고 훌훌 떠나는 삶에 만족했을 것 같습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하고 홀연히 떠나는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810일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우리에게 익숙한 밀알 한 알의 이야기는 순환이 자연의 근본 질서라고 알려줍니다. 순환은 서로 이어져 그 안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원 밖에서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은 원의 질서, 순환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다마()’에서 만들어진 아담(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순환은 돌고 도는 것, 주고받는 것입니다. 받을 때가 있으면 내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원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면서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줍니다. 원은 생명의 도형입니다.

 

순환의 원리는 세상 모든 것이 근원적 유대로 연결되어서 상호 의존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서로 의존한다는 것은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그만큼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존재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순환의 세계에서 가난번영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서로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며 가난해지면, 모두가 번영합니다. 자기만 살겠다며 자기의 번영에만 집착하면, 모두가 황폐해집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자신을 닫는 것입니다. 분리되고 단절됩니다. 순환을 무시하고 거부할 때 생명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세상에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연결되고 연대합니다. 순환을 존중하고 수용할 때, 생명은 번영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세상에서 갈수록 치열해지는 각자도생의 삶은 기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품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할수록 단절되고 분리되어 말라가고, 죽어갑니다. 우리 수도자는 공동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주고받는 생명의 원을 이루어나갈 때, 우리는 죽음의 현실에 생명을 보여주는 빛, 생명을 주는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8월 9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오늘 복음에서 국가든 종교든 권력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성전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폅니다. “임금이 세금을 거두는 것은 자기 자녀들이 아니라 남들이다. 자녀들은 세금에서 면제받는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그러니 성전세는 낼 필요가 없다”(마태 17,22-27). 그런데도 성전세를 내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강제력, 곧 권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 니...” 여차하면 종교 권력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권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위대하고 힘세며 정의로우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힘을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데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의 권력은 약한 이, 가난한 이를 보호하는데 사용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7-19). 세상의 권력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세상의 권력은 가진 이들의 편을 듭니다. 정부 권력의 역할은, 특히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가진 자들의 재산 보호였습니다. 사적 소유권(사유 재산)의 본질을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소유권은 본질적으로 물건(재산)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그 물건과 관련한 나와 다른 사람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소유권은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때 발생합니다. 이 관계를 누군가 무시할 때 내 소유권은 위협을 받습니다. 이걸 지켜줄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권력을 지닌 정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가 나뉠 때, 격차가 커질수록, 부자의 재산이 부자 것이 되려면 이것을 지켜줄 강제력이 중요해집니다. 부에 비례해서 커집니다. 기본적으로 가진 자들의 편일 수밖에 없는 세상의 권력은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권력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 하지 않는다”(요한 18,36). 예수님이 유일하게 긍정한 권력은 섬기는 권력이지만(마르 10,42-45), 세상에서 이런 권력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교회가 부자가 되면 안 되는 이유, 가난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권력의 본질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면,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설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권력은 세상의 권력과 비슷해집니다. 하느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는 오늘의 물신 사회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첨병입니다. 수도자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집니다. 자긍심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았으면 합니다. 




88일 연중 제19주일

 

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빵과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구나 먹어야 사니, 빵과 밥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의미의 종교가 사람이 먹는 것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잘만 먹으면, 먹는 것은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되풀이 언급됩니다(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이천식천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라는 뜻입니다.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라 했습니다. 쌀 한 톨도 땅과 하늘의 기운, 사람의 노력을 포함한 천지만물 덕분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나락 한 알 안에도 우주가 들어있습니다.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도 우주가 필요합니다. 내 안에, 내 삶에 우주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먹는 것은 온 우주를 품는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입니다. 하늘이 자신을 내어주어 하늘을 살리는 행위입니다. 불교에서 밥을 뜻하는 공양이라는 말은 희생이란 뜻의 공희(供犧)’에서 왔다고 합니다. 밥은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천지만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빵생명의 빵은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빵입니다. ‘이천식천을 생각하면 사실은 모든 빵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생명의 빵입니다. 문제는 빵, 먹는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천식천의 관점에서 보면, 먹는 행위는 예외 없이 생명체의 자기 보존 행위이며 동시에 하늘을 자기 안에 모시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먹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선택할 수는 있지만, 채식과 육식 자체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천지만물 덕분에 생겨난 먹을 것에 대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입니다. 육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고기가 대부분 농장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 덕분에 생겨난 생명을 물건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물건도 그렇게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이천식천의 태도를 지니면, 식물에서 왔든 동물에서 왔든 내가 먹는 것에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지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한테 왔는지가 중요하게 될 겁니다. 불필요한 과다 섭취도 없을 것입니다. 나도 때가 되면 기꺼이 세상을 먹여 살릴 빵과 밥이 되려는 마음을 키울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땅의 모든 존재를 먹이기 위해 자기를 내놓는 존재입니다. 이천식천의 마음으로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을 위해 자기를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따라 살면 세상이 평화롭습니다. 나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것을 취하되, 때가 되면 나를 기꺼이 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갈등과 폭력에 시달립니다. 오늘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질서를 따라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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