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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20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8-1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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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 달아나는 자 vs. 남는 자

 

탈레반이 다시 아프간을 점령했습니다. 수도 카불도 순식간에 접수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아슈라프 가니는 아랍에미레이트연방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자동차 4대 분량의 거액의 돈도 챙겼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부 고위 인사들도 줄줄이 도망쳤습니다. 가니 대통령은 국민에게는 위기 상황을 알리지 않은 채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25 전쟁 때 급박한 상황을 숨긴 채 먼저 한강 이남으로 도망친 대통령 이승만이 연상됩니다. 국민이 알게 되면 혼란이 일어나 자신의 도피에 방해가 되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탈레반이 장악한 카불에 주민들과 함께 남겠다고 밝힌 정부 고위 관리도 있습니다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교육부 장관 랑기나 하미디입니다. BBC와 인터뷰에서 하미디는 아프간 여성들의 교육을 돕기 위해서 남겠다고 밝혔습니다. 딸을 둔 자신도 다른 여성들처럼 두렵다고 울먹이면서도 남기로 했습니다. 최연소 시장, 최초의 여성 시장인 자리파 가파니도 인터뷰에서 탈레반은 나 같은 사람을 찾아서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남기로 했습니다. 1972년 칠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미국 CIA의 공작과 후원을 배경으로 군부의 실력자 피노체트가 일으켰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무장한 쿠데타군은 전투기를 동원해서 대통령 궁을 공습했습니다. 대통령 아얀데는 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피신하도록 한 다음, 자기는 궁에 끝까지 남아 저항하다가 폭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역사의 현장을 돌이켜보면서 지도자의 자질과 덕목의 으뜸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리가 양들을 공격할 때 진짜 목자는 자기가 돌보던 양 과 함께합니다. 바로 그때가 양들에게 목자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입니다. 가장 함께해야 할 때입니다. 국가의 책임자인 대통령이라면 국민과 함께하는 것, 시장이면 시민들과 함께하는 것, 사목자라면 자기가 맡은 양들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민이 없고, 시민이 없고, 양들이 없으면 대통령도 시장도 목자도 없습니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요한 10,12). 오늘도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달아난다는 것이 공간적인 차원만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공약했던 정책을 이리떼가 많다는 현실을 핑계로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정권과 정치인들은 자기를 지지했던 주권자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은 덕목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은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때이기도 합니다. 위험한 순간을 벗어나려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사람으로서 어찌 유혹이 하나도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놓고 번민했습니다. 그러나 남았습니다


오늘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김대건 신부님께도 그런 위기의 순간이 닥쳤지만 끝까지 자신의 믿음에 충실히 남았습니다. 평소 우리가 하는 일상의 기도야말로 갑자기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을 일상과 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편, 이런 위기의 순간은 오늘 우리 대부분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는 함께 하는지 도망가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함께 하는 것 같지만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기 소임을 진심으로 충실히 수행하는 것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820일 금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당시에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이웃은 동족에게 국한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도 동족에게만 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넓히려는 시도도 계속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때를 생각해서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하라는 권고와 규정을 구약성경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이웃의 영역을 모든 사람으로 넓혀 보편화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는 아예 이웃의 구분을 없애고 이웃은 되어 주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 됩니다.

 

사랑을 보편화하려는 이런 생각과 시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갑자기 어느 한순간에 생겨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만 나온 것도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던 지역의 하나가 모압이었습니다. 그런 모압의 여자 이 이스라엘 사람인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지극한 마음을 보입니다. 이웃과 이웃 사랑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힌 사람, 바로 모압의 여인룻입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기 1,16). 그때 룻에게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은 낯선 땅에서 남편과 아들 둘을 잃어버린 시어머니 나오미였습니다. 그런 나오미는 오히려 청상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들을 더 걱정합니다. “, 각자 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남편들과 나에게 해 준 것처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자애를 베푸시기를 빈다. 또한 주님께서 너희가 저마다 새 남편 집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도록 배려해 주시길 바란다”(룻기 1,8-9) 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나오미에게 이 모압의 며느리들은 며느리가 아니라 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또한 이 모압의 여인들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인 나오미를 얼마나 따뜻하게 모셨는지 암시해줍니다.

 

며느리들, 아니 딸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렵니다.” 룻이 또 말립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려무나. 어쩌자고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 너희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나 쓰라리단다”(룻기 1,10-11).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마음, 정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앞부분에 이 모압의 여인 이 나옵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낯선 땅에서 외톨이가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려고 했던 룻의 애틋한 마음도 오랜 세월을 흘러서 예수님께 도달했습니다. 함께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사랑도 보탰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도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오늘 내 주위의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내 마음을 부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이 흘러가 모이면 무너져가는 세상을 붙잡고 바꾸어내는 큰 사랑이 됩니다.




무한한 데나리온인 영원한 생명: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이 글은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니꼬데모 수녀님이 오늘 미사 중에 나누어주신 말씀입니다. 수녀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라고 했습니다(1절). 포도밭 임자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 9시쯤 온 사람들, 정오쯤, 오후 3시쯤, 오후 5시쯤에 온 사람들 모두에게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품삯, 한 데나 리온을 똑같이 주었습니다. 오후 3시쯤이나 오후 5시쯤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 셨는데 일한 것보다 품삯이 더 많지 않은가 생각하며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되어 요즘 이런 포도밭 주인이 정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투덜거리며 똑같이 대우한다고 주인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주인에게 말은 하지 못하는 저 자신도 보게 됩니다. 한편 몇 년 전 이 복음을 묵상할 때, 제가 오후 5시쯤도 아닌 5시 30분쯤에 와서 일했는데 한 데 나리온을 주셔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우는데 일하지 않고 거저 받은 것들이 많이 떠올 라 더 흐느껴 엉엉 울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거저 받았고 지금도 거저 받고 있습니다. 


농부소비녀인 저는 오늘 복음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나라는 농가 일손돕기를 다니 는 사람들과 같다. .......’ 농가 일손돕기! 수녀님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작년부터 농가 일손돕 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일손돕기를 다니게 된 동기는 농촌에 일꾼이 없어서 일꾼을 구하기 힘 들거나 간신히 구하는데 이 힘들게 구하는 분들이 대부분 할머니 아니면 이주민이라는 현실에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몸이 빠르지는 않지만 계속 일을 하셨기에 잘하시고, 이주민들은 잘하 지는 못하지만 일손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일꾼으로 사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2020년 초 부터 이주민들이 코로나19로 본국으로 되돌아가 농민들은 농사를 어떻게 할지 큰 걱정이었습 니다. 그래서 농가 일손돕기를 시작했습니다. 일손돕기를 하면 항상 ‘우리가 한 일이 도움이 됐을까? 이주민만큼은 했겠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블루베리 농장을 하시는 요셉 형제님은 작년에 거름을 손수레에 싣다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치셔서 입원 중이셨는데, 농가 일손돕기 날, 환자복에 목발을 짚은 채 오셔서 점심을 해 주 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쌀을 씻고 상추를 뜯고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줄 준비를 하는 것을 본 호세아 수녀님이 결국 점심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 삼겹살을 먹으면서 눈물을 뺐습니다. 나무가 없어 아궁이에 이것저것 넣다 보니 연기가 가득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아픈 몸으로 도 일해야 하는 농민들의 고단한 현실이 연기보다 맵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농가 일손돕기로 자주 가는 농가는 ‘별향기농원’과 ‘안뜨레농장’입니다. 올 7월에 별향기농원 은 일손돕기를 2번하고 안뜨레농장은 1번 했는데, 8월에도 7월과 같이 별향기농원 2번 안뜨 레농장 1번이었습니다. 안뜨레농장 로사 자매님께 왜 별향기농원만 계속 2번이냐고 여쭈었습 니다. 자매님은 별향기농원은 귀농을 했고 형제님이 연세가 많으시고 편찮으신데, 안뜨레농장 형제님은 별향기농원 형제님보다 젊고 건강하셔서 일을 더 할 수 있고 이 지역 사람이라 어렵 게라도 일꾼을 구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기온이 34~35도인 올해 최고의 삼복 더위에도 새벽부터 어두움이 내릴 때까지 온몸으로 고된 일을 하면서도 더 어려운 친구를 생 각하는 걸 보고 제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그동안 밭농사만 하다 작년부터 논농사도 시작하면서 우리 일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농가 일손돕기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코로나19로 더 큰 곤경 중에 있는 농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고 그분들의 어려움과 절망을 알면서 함께 하지 않으면 마음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풀무학교’에서 농사를 배울 때도 아무리 바쁘고 힘 들어도 일손돕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의 농사도 농민들의 농사도 농부소비녀의 농사 이고 주님의 농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일손돕기가 끝나면 농민은 농산물을 나누어 주시는데, 받을 때면 언제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크 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도밭 임자가 오후 5시쯤에 온 사람들부터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준 것처럼 농민들은 농산물을 나누어 줍니다. 돕고 나누며 이렇 게 사는 삶이 하늘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본원 공동체에서 사는 저는 오늘 복음을 또 ‘하늘나라는 성가소비녀 회 의정부관구 본원공동체와 같다.’라고 이어 씁니다. 우리 소비녀들은 하늘나라를 위하여 온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지금 이곳 본원 공 동체가 바로 ‘하늘나라’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원공동체에는 수도복을 만드는 바느질 방 수녀님들, 다듬기를 하는 수녀님들, 밥을 하는 수 녀님들,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는 공방 수녀님들, 농사를 짓는 수녀님들, 피정동을 관리하는 수녀님, 피정하는 수녀님들, ‘계속수련’ 수녀님들, 종신서원 예정 수녀님들, 학생 수 녀님들, 수녀원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국 수녀님들, 안내실 수녀님들, ‘정의 평화 창조보전’을 위해 일하는 수녀님들, 환자 수녀님들, 전례를 담당하는 수녀님들, 행정 하는 수녀님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꾼들이 포도밭에서 일하듯 소비녀들은 수도공동체에서 또는 현장에서 맡은 사도직을 합니다. 일꾼들이 일하고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듯이 소비녀들은 소임을 하고 한 식당에서 같은 밥을 먹으며 생활을 나누고 기도하며 공동생활을 합니다. 때로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이 제일 늦게 온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투덜거리며 밭 임자에게 따지며 말하였듯, 우리 소비녀들도 투덜거리며 큰 소리를 낼 때도 있습니다. 또 묵상하고 공 동기도를 하고 미사를 하는데 미사 중에는 예수님께서 성체로 한 데나리온이 아닌 무한한 데 나리온인 영원한 생명으로 오십니다. 


‘하늘나라는 농가 일손돕기를 다니는 사람들과 같다.’ 

‘하늘나라는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본원공동체와 같다.’




817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4-26).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느님은 전능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될까? 그러면 하느님의 전능함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능력인가? 그러면 하느님은 전능한 그러나 폭군과 같은 분인가? 하느님은 곡선자로 직선을 그을 수 있나?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전능함을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초대합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는 전능함이 아니라 무력함의 상징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하느님의 전능함이 양립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어떤 폭력적 횡포 앞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의 본성인 사랑과 진리에 충실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능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하느님의 전능함은 사랑의 전능함입니다. 곡선자로 직선을 긋는 기괴한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무력함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에 충실할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함을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전능함이 언제나 사랑과 진리에 충실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도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재산을 놓지 않기 때문이고, 이것은 부자가 재산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있으니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재산의 힘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하느님은 이집트의 신을 물리치셨듯이 물신을 물리쳐 부자를 재산에서 자유롭게 만드실 수 있다. 그렇게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 문제는 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강요가 아니라 초대의 방식으로 사람을 움직이십니다. 부자가 재물에 계속 매달린다고 해도 하느님은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결론은 이제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우리가 누구든, ‘끝까지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계속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오늘의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816일 제20주간 월요일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8-19). 생명에 들어가려면 지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입니다. 젊은이는 이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고는 바로 이어서 묻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아직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해서 나온 물음이 아닙니다. 계명을 다 지켜왔음에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꼈기에 본인이 한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계명을 실천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완전함이 있다. 그런데 그 완전함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재산입니다.

 

재산이 왜 완전함을 방해할까?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하느님에 뜻에 따라 살 때, 완전해집니다. 재산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신입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재물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합니다. 오늘 <판관기>에 나오듯 구약 시대에는 바알이 대표적입니다. ‘풍요의 신입니다. 바알을 섬기면 하느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면 바알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양자택일입니다. 오늘날은 소비’, ‘상품’, ‘시장이 신으로 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이 젊은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재물은 진정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2).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재물을 처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펐습니다. 내가 재물을 진정으로 소유했다면, 나는 재물의 주인입니다.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재물을 소유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섬기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재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재물의 종으로 재물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완전으로 가는 길이 막힙니다. 계명을 지키지만, 그 실천이 계명의 정신과 뿌리까지 닿지 못합니다. 그러니 계명을 지켜도 형식에 머물러서 무언가 부족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완전하게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수도자는 가난 서원으로 재물의 고리를 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번에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주 교묘한 방식과 형태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오늘 <판관기>바알이 얼마나 이스라엘 자손들을 끈질기게 사로잡는지를 잘 보여줍니다(2,11-19). 하지만 실망해서 포기할 것도 슬퍼할 할 것도 없습니다. 이 젊은이처럼 슬퍼하며 떠나는 대신, ‘매일같이 그 고리를 끊으면 됩니다.




8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초대

 

부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듯, 우리는 승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을 하느님이 일으키셨다.’ ‘십자가의 상처를 지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이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부활이해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 결과인 십자가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여전히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삶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 연민을 빼놓고 예수 부활은 어떻게 이해해도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삶이 참된 삶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삶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긍정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의 삶이 옳다!

 

성모 승천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승천하신 성모님에게 땅에서 살았던 마리아의 삶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안타깝지만 마리아의 삶에 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당시의 사회, 문화에 관한 연구 결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인구 1,600명 정도의 조그만 고을,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태어났고 소농 계급에 속했을 겁니다. 당시 이들의 삶은 힘들었으니, 아름다운 모습의 성가정 상은 상당히 비현실적입니다. 둘째, 마리아는 당시의 여느 여성처럼 하루 10시간 정도의 가사 일을 했을 겁니다. 집안일은 주로 물 긷기, 장작 수집, 요리, 설거지 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성화에 나오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노동에 단련된 몸매의 처녀였을 겁니다. 셋째, 당시에는 다산과 정결 등의 이유로 대개 13살 정도에 결혼했습니다. 예수님이 30대 초반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면, 마리아는 50세 가까이 되었을 겁니다. 당시 평균 수명보다 약간 많은 나이입니다. 요컨대, 외면적으로 마리아는 평범한 그래서 상당히 고단한 여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의 내면은 어땠을까?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마음을 살짝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사는 산골에 가서 석 달가량 지내고 돌아갑니다. 나이가 많았던 엘리사벳은 당시에 임신 6개월 정도였으니 이제 조금씩 몸이 무거워질 때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필시 엘리사벳을 도우려고 찾아갔을 겁니다. 3개월은 맡아야 하는 집안일이 있는 여성에게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엘리사벳에게 큰마음을 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향한 마리아의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마리아 찬가도 마리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시골 처녀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듯 하지만, 마리아는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노래했을 뿐입니다. 마리아의 하느님은 출애굽의 하느님,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의 하느님입니다.

 

마리아는 해방의 하느님, 약자의 하느님을 믿으며 예수를 키웠습니다. 어린 예수는 엄마의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누구에게 먼저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알게 되었을 겁니다. 때가 차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떠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비천한 이들굶주린 이들에게 다가가 어머니께 배운 것을 실천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그런 아들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처형당한 십자가 아래까지 함께 했습니다(요한 19,25-27).

 

이렇게 말했어도 성모 승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활과 마찬가지로, 성모 승천이 마리아의 삶에 하느님의 절대적인 긍정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마리아의 삶이 옳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평범한 여인 마리아, 마리아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평범한 우리도 하느님이 긍정하시는, 하느님이 옳다고 하시는 그런 삶, 성모님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격려하십니다. 성모승천대축일을 지내는 오늘, 신앙 안에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삶, 곧 예수님의 삶,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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