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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격리사회의 그리스도인_2월 14일 주일 강론2021-02-1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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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사회의 그리스도인

 

- 연중 6주일 조현철 신부 강론


코로나19 감염병 대유행으로 격리가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격리는 따로 떼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인격체이고, 인격체의 핵심은 같은 인격체인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관계를 차단한다는 격리는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무서운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요즘 우리는 모두가 서로 어떤 식으로든 격리되었습니다. 거리 두기도 일종의 완화된 격리입니다. 마스크는 개인과 개인을 격리합니다.

사람의 본질을 거스르는 격리는 특정한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 격리는 감염의 추가 확산을 막는 것,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될 겁니다. 악성 피부병 환자에 대한 구약성경의 율법, 곧 환자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하는 것도 확산을 막는 조치로 정당화됩니다(레위 13,45-46).

 

정당화로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정당한 이유로 격리되었다 해도, 격리 당사자는 굉장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습니다. 생명체는 무릇 다른 생명체와 연결되어야 하고, 사람은 생물학적 연결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연결도 필요합니다. 인격적 관계가 장기간 끊기면, 생물학적인 동물로는 살아 있어도 사람으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나병 환자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마르 1,41). 그 사람은 나병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서 격리되어 살았을 겁니다. 가엾은 마음은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이고, ‘스플랑크논(창자)’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고 애가 끊어질 듯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도 세상에서의 격리로 애가 끊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나병 환자의 처지로 한발 들어섰습니다. 예수님은 저만큼 떨어져서 격리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서 있습니다. 떨어져서 보는 것과 함께 있으면서 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곳이라도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집니다. 함께 섰을 때, ‘격리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내 앞의 이 사람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현실의 격리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불편하고 힘들지만, 현실의 실체를 보도록 해줍니다. 추상에 빠지면 현실의 실체를 놓치고 대개 숫자만 남습니다.

 

그렇게 구체적인 격리를 마주하면, 싸워서 깨버려야 할 격리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장애인 수용 시설은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장애인을 세상에서 격리해서 비장애인을 보호하는 기능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비장애인의 편의, 비장애인의 평화를 위한 시설인 수가 많습니다. 중증 장애인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살 때, 우리가 느끼고 부담해야 할 불편함을 예방해줍니다. 섬 전체가 격리 시설이었던 소록도를 생각해봅니다. 전염력이 없는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나가기 싫어한 사람이 혹시라도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죽어도 세상에 나가 살고 싶지만, 밖에서는 도저히 살 엄두가 나질 않아서, 밖에서 받아줄 리가 없으니 지레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포기를 강요당한 것입니다.

 

소록도 100주년을 맞아 고흥군이 40여 년간 한센인들을 돌보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를 노벨평화상에 추천한다고 한다. 한센 병력으로 인해 격리된 사람들의 섬 소록도는 오랜 세월 차별과 폭력, 단종과 학살이 자행된 인권의 사각지대이자 침묵의 땅이었다. 수녀님과 같은 이들이 있어 갇힌 사람들은 고통을 덜었을 것이나, 덕분에 그 고통은 10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지속 가능함은 분명 어떤 평화에 기여했을 것이나, 그것은 실상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가둔 사람들, 소록도가 아니라 소록도에서 바라본 육지의 것이 아니었던가. 오래전에 깨지는 게 더 좋았을 당신들의 평화말이다.”(홍은전, “당신들의 평화” <그냥, 사람> 34-37). 십 년 넘게 노들장애인야학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던 홍은전이 짚은 대로 세상에 좋은 시설은 없습니다. 거기서 행복해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결국 시설입니다. 자발적으로 가더라도 그것은 할 수 없어서,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기 싫어서 가는 겁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격리도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격리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격리가 일상화되면서 격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격리당하는 사람의 고통도 일상적인 것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일인데도 말입니다. 도움을 청하러 온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 접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접촉으로 예수님도 부정해집니다. 일단 그 사람에게 손을 대면 예수님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예수님이 이렇게 신신당부하신 것은 그저 겸양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이 지역에 알려지면 예수님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치유되면 이 사람이 예수님의 당부를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과 억눌림에서의 해방, 그 놀라움과 기쁨을 어떻게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 신변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나병 환자에 손을 내민 것입니다. 애끓는 가엾은 마음이 신변의 불이익이라는 손익계산을 물리쳤습니다. 병이 없어지자, 예상대로 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격리되었습니다.

격리가 일상화되는 현실입니다. 언제 끝날지 기약하기도 힘듭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격리를 당한 자와 운 좋게 격리를 면한 자로 나뉠수록, 세상은 그만큼 살기 힘들고 위험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하게 격리를 당한 자와 그들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미는 자로 이어질수록, 세상은 그만큼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먹은 그만큼 세상은 그렇게 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손 내밀기를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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