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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회개와 근원적 변화_조현철 신부 강론2021-01-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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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일)  


바오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1코린 7,29)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는 결정적인 무엇을 위한 시간,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니네베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가로지르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니, 굉장한 번영을 구가하던 대도시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요나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니네베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사회의 약자,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의 하느님이며, 하느님께 대한 죄는 이들의 억압과 착취로 나타납니다. 니네베의 번영은 이들 약자의 피땀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들의 울부짖음이 하느님께 닿았습니다. 이 하느님은 이집트의 압제와 수탈에 허덕이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이들을 해방하려고 이집트를 쳤던 그 하느님, 바로 야훼 하느님입니다(<탈출기>).

 

요나는 니네베에 들이닥칠 대재앙을 경고하고 회개를 요구했습니다. 바뀔 것을 요구했습니다. ‘

40일 남았습니다. 그리고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는 단식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임금에서 짐승까지 모두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이사야서>). 


성경의 단식은 약자를 향한 사회적 연대 행위를 가리킵니다. 억압과 착취를 일삼던 니네베의 근원적 변화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임박한 파국의 경고를 시대의 징표로 알아들은 니네베 사람들은 극적으로 변화했고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이 발생한 지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재난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니네베만큼 변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질문이 몰려옵니다. 이번 재난을 계기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과 평등을 정말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할까? 감염보다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사회안전망을 만들자고 마음을 모을까? 바이러스 창궐하기 전의 평온한때에도 하루 7명의 노동자가 매일 산재로 죽어야 하는 사회, 갑질로 인한 좌절과 분노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삶을 버리는 사회를 안전하고 평등한 정의로운 사회로 바꾸려 할까? 이런 구조를 방치한 것에 대한 사회적 참회가 가능할까? 우리 일상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재앙이 가능하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핵발전소 같은 위험 시설을 기꺼이 포기할까? 기후재난이 현실이 되기 전에 온실가스를 과감히 줄이고 그 불편을 기쁘게 받아들일까?

 

물음은 계속 올라옵니다. 이 환난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익숙한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을까? 효율과 성장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비정규의 굴레를 강요하며 약자의 생명을 볼모로 삼는 일을 계속하지 않을까? 지금의 편익을 계속 누리려고, 기후재난과 핵사고는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가혹한 재앙, 파국의 문을 스스로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가 코로나19 감염병을 우리의 근본 문제를 보여주는 시대의 징표로 읽기를, 이 환난의 때를 새 세상을 여는 카이로스로 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단식처럼, ‘를 위한 바오로 사도의 요구는 구체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내” “울음” “기쁨” “물건” “세상의 이용을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렸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삯꾼들을 떠났습니다. 이 버림과 떠남의 행위는 이전의 삶과 단절, 근원적 전환을 뜻합니다. 성경의 회개는 단순한 도덕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회개는 새로운 현실이 닥쳤음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게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과거의 무엇인가를 버리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무엇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세상의 존재들을 기계의 부품과 시장의 상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과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로 보게 됩니다. 세상은 기계나 시장이 아니라 우리 공동의 (오이코스)’이 됩니다. 우리가 지녔던 기계론적 세계관과 소비주의 세계관은 생태적 세계관으로 바뀝니다.

 

코로나19 감염병은 새로운 현실이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우리 시대의 징표입니다. 삶과 세상이 지속하는 한, 우리의 회개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서원으로 수도자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 회개로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되어갑니다. 수도자가 되어갑니다.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수도자가 되기 위해, 아니 하느님의 모상,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복음이 언제나 우리에게 내놓는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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