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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수 부활에 관한 단상2021-04-0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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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 신앙의 기원이자 원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성야 미사를 가장 장엄하고 성대하게 지냅니다. 그렇지만 이 부활 사건 자체가 어떤 것인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복음도 부활 자체에 관해서는 철저히 침묵합니다. ‘빈 무덤과 부활한 예수의 발현이 복음이 전해주는 부활 이야기의 전부지요. 빈 무덤은 부활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빈 무덤을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요한 20,2).

 

부활은 우리의 인식과 체험을 철저히 초월하는 사건이긴 하지만, 부활의 의미에 관해서 몇 가지 생각해볼 수는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부활도 맥락을 제거하고 사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면 의미가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맥락을 빼버리면 십자가 죽음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기가 쉽듯이, 부활도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마술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부활도 예수님의 삶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지만 우리 한가운데 들어오신 하느님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지요. 부활은 세상의 폭력적 반응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대응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이 자신을 세상에 거저 내어주신 일관된 하나의 사건,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예수 부활도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맥락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이 예수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고 알려줍니다. 부활 사건을 계기로 다시 모인 제자들을 통해서, 그 제자들의 제자들인 우리를 통해서 계속된다는 겁니다.

 

둘째, 복음은 부활 사건 자체에 관해서는 침묵하지만,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전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는 것은 압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부활이라고도 말하지요. 부활은 하느님이 행하신 일,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계시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가 그 뜻에 반하는 세상의 힘, 빛을 거부하는 어둠의 힘에 죽임을 당했지요. 예수님의 죽음은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희생자의 죽음입니다. 일반적인 죽음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예수 부활의 구체성과 예리함이 사라집니다. 부활은 하느님이 희생자, 특히 의로움을 추구하다 희생된 사람의 죽음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부활의 하느님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억압과 죽음의 땅에서 자유와 생명의 땅으로 이끌어내신 출애굽의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 해방의 하느님입니다.

 

셋째, 예수 부활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없애거나 축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기시킵니다. 무덤 속 젊은이도, 부활하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래아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자라난 곳이고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려고 애쓴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예언자도 메시아도 나오지 않는 곳이라며 무시했던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변부, 곧 변경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이 아니라 지방입니다. 부활의 첫 메시지는 변두리로 가라는 것이지요. 물론 지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내적 지향에서도 주변부를 지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즉위 후 끊임없이 우리에게 밖으로나가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밖으로 나가되 주변부로 가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새로운 미래를 발견하고 싶다면 주변부로 가야 합니다. 하느님도 피조물을 재건하려 하실 때 주변부로 가셨습니다”(<렛 어스 드림>) 38). 실제로 교종 자신도 이라크 방문’(202135~8)을 감행했지요. 1년 동안의 코로나 봉쇄 이후 첫 번째 외부 방문이 이라크라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라크는 현대 세계에서 가장 주변부에 속하는 곳이지요. 이라크는 언제부턴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단절된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라크 방문은 주변부로 가려는 교종의 노력입니다. 주변부에서 세계 변화의 씨앗을 뿌리려는 노력일 겁니다.

 

왜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 변두리일까요? 역사적으로, 세계 변화는 늘 중심이 아니라 변경에서 왔습니다. 지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중심은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를 거부합니다. 변화의 가능성은 늘 변화를 갈망하는 변두리에 있습니다. 부활이 초대하는 곳, 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는 삶의 자리는 늘 갈릴래아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화려한 지위나 막강한 권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나자렛 예수, 갈릴래아의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정의·평화·창조보전(JPIC)에 헌신하는 것이지요. 부활을 둘러싼,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은 쓸모없는 껍데기들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부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십자가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힘이 여전히 세상에 견고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지요. 이런 현실에서 우리를 하늘만 쳐다보게 만드는 부활 해석은 공허하거나 그 저의를 의심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가 부활이 초대하는 삶을 살려고 하기만 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내 줄까요?”(마르 16,3)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아가던 여인들의 걱정과 달리,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지요. 우리가 부활한 예수를 찾아 나설 때, 힘을 함께 모아서 연대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보살펴 줄 여관 주인을 찾았습니다.”(<모든 형제들> 78)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한편으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당부합니다(루카 10,2-4).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투신할 때, 반드시 우리와 연대하려는 협력자들이 나타납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절박한 곳, ‘갈릴래아로 부릅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가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잊지 말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마르 16,7).



-예수회 조현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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