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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중 제 18주간 강론_조현철 신부2021-08-0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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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 독서에서 두 가지 교육학/교육학(pedagogy)을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는 겸손함의 교육학, 둘째는 자신감의 교육학입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과학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이라는 사람이 지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의 기원은 아이삭 뉴턴입니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동시대의 물리학자, 화학자, 천문학자였던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뉴턴의 탁월함 속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문구로 많이 언급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고 진실입니다. 과학적 지식과 발견은 그 이전에 이루어 놓은 지식과 발견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입니다. 이전이 없다면 지금도 없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때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지금 갈 곳에는 너희가 세우지도 채우지도 파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았는데도 온갖 것들이 이미 거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너희가 마음껏 먹게 될 때,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신명 6,11-12). 이스라엘 백성이 번영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해서 일깨웁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인가 했다면, 이미 이루어진 것에 무언가 조금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이런 것은 이미 다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성취한 듯, 약자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 우리의 삶도 당연히 사회적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물건이나 먹는 음식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 힘만으로 만든 건 없습니다. 모두 다른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나에게 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돈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입합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마치 내 힘만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가 사람의 사회적 상호의존 관계를 보이지 않게, 느낄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상품과 돈만 보입니다. 마르크스는 이 현상을 상품의 물신 숭배라며 자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의미 있는, 아니 오늘에 더 의미 있는 비판입니다. 자본주의와 시장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었다면, 그것은 이전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 덕분입니다. 현재의 사회적 연결망 덕분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 덕분입니다. 만사에 겸손할 일입니다.

 

둘째, 자신감입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나중에 예수님께 묻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예수님은 이런 때 그럼, 내가 해 줄게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엄청난 격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 제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제자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청하며 다가오는 오는 사람에게도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서 의지와 힘을 끌어올립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 “믿기만 하여라.”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외부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길러내도록 합니다. 실존적 변화로 자신감을 지니도록 돕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덕분이라는, 사회적으로는 다른 많은 사람 덕분이라는 겸손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자신감을 지닌다면, 정말 멋진 그리스도인, 괜찮은 수도자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우리는 거룩한 변모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 어떤 현상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 체험이 있고 난 뒤에 생겨났을 이 일화가 암시하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모하신 후에 들린 소리가 해석의 열쇳말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와 아주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후에도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세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하느님은 예수님이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위로하셨고 배고픈 군중을 먹이셨고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성공과 환영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권력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신변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세례 때 들렸던 말이 거룩한 변모의 때에 반복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헌신해온 예수님의 삶을 하느님이 다시 확인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런저런 곡절이 있었고 세상의 반응은 갈렸지만, 하느님은 예수님의 삶이 마음에 드셨습니다.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카이사리아 필립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삶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승리와 영광의 그리스도를 고집한 직후에 나옵니다(마르 8,27 이하; 마태 16,13 이하).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에 함께 하도록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의 방식, 세상의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완고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례 때는 없었지만 거룩한 변모의 때에 추가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의 의도와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따를 것!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유혹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끌리는 것을 예수님께 투사하여 그것을 예수님의 삶이라고 여깁니다. 돈과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가신 길에 의문을 품고 흔들립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이 당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도 여전히, 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삶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85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칭호(title)나 범주(category)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매우 유용합니다. “그 사람, 신부야.” “그 사람, 수도자야.” “저 사람은 진보, 이 사람은 보수야.” 하나의 호칭, 범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규정하고 인식합니다. 편리합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호칭과 범주는 그 대상을 정형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측면이지만 호칭과 범주 밖에 있으면 제거됩니다. 그래서 호칭과 범주만으로 그 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호칭과 범주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지만, ‘이 사람저것은 언제나 고유하고 구체적입니다. 일단 일반적인 호칭과 범주를 적용한 다음에는 거꾸로 이 사람저것으로 그 호칭과 범주를 구체화해야 합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칭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내다본 그리스도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도라서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유대교 전통 안에서 물려받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관념에는 고난이나 죽음같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언제나 전능하신 분, 승리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수난의 메시아 관념은 없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패배일 뿐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런 일[수난과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이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한편 베드로의 그리스도 이해는 예수님에게도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외형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치유했고 많은 사람을 먹였습니다. 그래서 추종자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제자들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 도래를 기대할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는 있지만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힘이 저 힘을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하는 현실은 언제나 힘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만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 확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으면, 이제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내용은 예수님의 삶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하길 거절했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여전히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갔습니다. 칭호, 범주에 의한 고정 관념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태 16,23). 일종의 충격 요법입니다. 그래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제자들은 여전히 승리와 영광의 그리스도를 고집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런 일은 오늘도 자주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르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내가 원하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됩니다.

 


84일 연중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전통의 힘은 큽니다. 전통은 그 전통 속에서 자라난 사람의 의식 세계를 상당한 정도로 규정합니다. 예수님 또한 자신이 자라난 종교와 문화 전통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향을 받은 그만큼 전통의 한계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이 한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선민의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을 때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지역입니다. 그 고장에 사는 어떤 가나안 부인’, 곧 이방인이 예수님께 마귀 들린 자기 딸을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완전히 무시합니다.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질러대고 제자들이 어떻게 좀 하시라고 하니까 그제야 대답합니다. 거부였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마태 15,24). 이 이방인 여인은 이번에는 엎드려 절하며다시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모질게 거부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참담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 딸이 호되게 앓고 있습니다. 다시 청합니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이 여인의 청을 들어줍니다. “,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 장면을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본 것이라고 해석하면 어딘가 좀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서 일한다.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런 말을 순전히 상대의 믿음을 떠보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너무 잔인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여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 사가의 편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차지한다는 여인의 말에서 하느님은 이방인을 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모든 피조물을 두루 살피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인식의 한계를 깨닫고 그 지평을 넓힙니다. 자신의 사명을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설정합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여인에게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고 그 즉시 가나안 부인이 깨우쳐준 진실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뛰어난 점이고,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완고한 것이 문제입니다.




83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인종차별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습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출애굽을 이끈 지도자 모세도 인종차별을 겪었습니다(민수 12,1-13). 모세는 자신의 아내 문제로 가까운 동족들에게 곤욕을 겪습니다.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자 미르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고 나선 겁니다. 이유는 에티오피아 여자라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모세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만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인종차별입니다.

인권 의식이 전반적으로 향상하면서 오늘날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많이 없어졌지만, 인종차별은 아직도 은밀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발생합니다. ‘단일민족이나 순혈주의같은 관념도 인종차별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백의민족으로, 이스라엘은 선민이라는 말로 자신을 규정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세계를 제집 드나들 듯이 하는 IT 강국이라고 하지만,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매우 폐쇄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이주 노동자와 난민에서 보듯이, 우리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나라와 정치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유독 심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단일민족이니 순혈이니 하는 것은 없습니다. 없을 뿐 아니라, 이런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사람에 대한 배제, 차별, 혐오의 뿌리가 됩니다. 우리도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외부인이었습니다. 요행히 이곳에 자리를 잡은 후에도 외부와 접촉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접촉은 교역, 정치적 관계, 전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국경 지대는 특히 더 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형성의 계기가 된 출애굽 장면을 보겠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 가량이나 되었다.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와 함께 올라가고,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탈출 12,37-38). 처음부터 많은 이국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이국인들과 함께 형성되었습니다. 사실 히브리인의 경계가 어디인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자기들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경의 포용성과 개방성과 솔직함은 놀랍습니다. 성경에는 이방인, 곧 외부인이 주요 인물로 곧잘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창녀 라합, 이스라엘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던 모압 여인 룻,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 장군 우리야의 아내는 모두 이방인에 여성으로 버젓이 예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루카 10), 사마리아 여인(요한 4),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마르 7)는 신약성경의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모세를 비방한 미르암과 아론은 자기들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그 안의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8월 2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열심히 일하다가도 상황이 너무 막막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황에 압도되어 주저앉아 버리게 됩니다. 시나이 광야에서 모세가 그랬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지낼 때, 모세에게 딸린 사람이 “육십만 명”이 넘었습니다(민수 11,21). 이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아우성칩니다.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고 싶다고 침을 흘립니다(민수 11,5). 그런데 먹을 것이라곤 ‘만나’밖에 없습니다. 막막한 상황에 처한 모세는 하느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소연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13).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은 처형당한 사건을 듣고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직감하셨습니다.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는 것은 피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절박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려고 하신 예수님에게는 썩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있었고 군중은 육로로 쫓아왔습니다. 배를 돌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굳이’ 배에서 내리셨습니다(마태 14,14). 그리고 장정만 5천이 넘는 군중을 만났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저녁때 가 되어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신변의 위협에 처한 자신에게 삶에 지친 군중들이 몰려오는 막막한 상황에서 무엇이 예수님을 배에서 내리게 했을까? 이들을 만나게 했을까?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움직인 동력은 “가엾은 마음(스플랑크니조마이)”, 애끊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상황이

아무리 막막해도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엾은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예수님은 상대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는 것은 관심으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루카 10,33). 그냥 휙 지나치면

안 됐다는 마음은 생길 수 있어도, 상대의 처지에 깊이 공감해서 나를 움직이는 힘까 지 생기지는 않습니다.


‘가엾은 마음’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자세히 보는 것,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81일 연중 제18주일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 진영에서 내걸었던 선거 운동 문구입니다. 이 구호는 미소 냉전이 끝나고 불황에 빠진 당시의 미국 대선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대체로 어느 나라나 그렇습니다. 결국 선거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민감합니다. 빵이나 밥은 경제를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경제는 빵과 밥을 많이 만들지는 몰라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알아서 재주껏, 능력껏 가져가라고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이집트에서 먹었던 빵 이야기를 합니다(탈출 16,2-3). 우리는 일용할 양식인 빵과 밥을 어떻게 얻고 있나요? 이집트 제국의 방식은 힘에 의한 방식이었니다. 요즘은 자유(방임)에 의한 방식입니다. 언제나 강자가 많은 것을 가져가고 약자는 굶주리는, 그러니까 여전히 힘에 의한 방식입니다. 어차피 사람의 힘과 능력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고 세습화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사회적 불평등은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정의 이름으로 평등과 정의가 훼손됩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가 억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빵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당신을 찾아온 군중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을 얻으려 힘쓰라고 당부하십니다(요한 6,27.33).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요한 6.34).

 

이 양식, 이 빵이 일용할 양식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면서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께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따라온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고 그들을 먹이려고 애쓰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에서는 빵을 당신의 몸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과 영원한 양식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 양식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어떤 것으로 설정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각자가 능력껏 빵을 차지하면 그뿐입니다. 절대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거부하면 상대적인 것과 유한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자신을 절대화하는 독재 권력이 좋은 사례입니다. 역사는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빵이 절대화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현실이었고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영원한 양식을 얻으려고 애쓸 때, 우리가 만드는 빵을 생명의 빵으로 여길 때, 우리는 땅에서 생산한 양식을 고루 분배하여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누구나 필요한 빵에 힘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의 원리를 적용합니다. 소외되는 사람이 없이 빵을 나누도록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과 일용할 양식이 만납니다. 서로 하나가 됩니다. 그럴 때, 누구도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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