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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십자가에 관한 단상_성금요일강론2021-04-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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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 십자가에 관한 단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당일 일어난 사건으로만 바라보면, 그 의미가 이상해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큽니다. 고난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본다든가 하는 왜곡된 믿음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복음이 일관되게 알려주듯이,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하려고 오셨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분의 삶,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에 쏟아 부은 그 삶의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그 삶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박해와 고난과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신 초기부터 감지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놓아두면 안 되겠다는 움직임이 복음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에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사두가이의 종교권력 그리고 헤로데와 빌라도의 정치 권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헌신하는 자신의 삶을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 결과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나도 동참하겠다는 것은 고난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고난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의 을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고난이 불가피하자면, 그 고난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결단을 뜻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고난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를 때 수반되는 고난을 기꺼이 짊어질 용기와 인내를 청해야 하겠지요.

 

세상이 하느님과 불화한다면, 세상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우리도 세상과 불화하는 것이 맞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과 편안한 관계라면, 이제 드디어세상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든지(그렇다면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은 이제 유효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가요?) 아니면 우리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상을 따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만일 후자라면, 다른 전례도 마찬가지지만 성금요일 전례는 성사가 아니라 하나의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슬픈 일이지요.

 

십자가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도 역사에서 일어난, 지금도 일어나는 수많은 십자가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역사 속의 십자가들속에 놓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가 지니는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진정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과 정의에 목말라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우리와 함께 계셨음을 상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복음으로 남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힘이 여전히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길을 계속해서 따를 힘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회 조현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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