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제목주님봉헌축일 교황님 강론2021-02-06 19:06
작성자


202122일 주님 봉헌 축일 미사

교종 프란치스코의 강론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다(루카 2,25)고 성 루카는 기록합니다. 그는 성전으로 올라가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데리고 오자 구세주를 두 팔에 받아 안습니다. 그 아기 안에서 민족들을 비추러 오신 빛을 알아보는 것은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인내로써 기다려온 이미 나이가 많은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시메온의 인내. 이 노인의 인내를 가까이서 바라봅시다. 평생 동안 그는 기다렸고 인내심을 발휘하였습니다. 기도 안에서 그는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사건들 안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의 단조로운 겉모습 안에서, 때로는 활동으로 지친 리듬 안에서, 우리가 당신 뜻을 찾으면서 끈기와 겸손으로 해나가는 작은 일들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인내로 걸으면서 시메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속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의 기나긴 생애 속에서 때로는 상처도 받고 실망도 했겠지요. 하지만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씁쓸함이나 인생의 황혼기에 도달할 때 솟아나는 그 체념의 우울함에 휩쓸리지 않고 인내로 그는 약속을 간직합니다 약속을 간직하기 . 시메온 안에서 기다림의 희망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그의 눈이 구원을 본(루카 2,30 참조) 때까지 깨어 있는 사람의 일상적 인내로 옮겨집니다.

저는 저 혼자서 묻습니다. 시메온은 이 인내를 어디서 배웠을까? 그는 인내를 기도에서 그리고 자기 백성의 삶에서 받았습니다. 그 백성은 주님 안에서 항상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하느님(탈출 34,6)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백성은 거부와 불충실 앞에서도 지치지 않는, 아니 느헤미야가 말한 것처럼 매번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해 주시고자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참아 주신(느헤 9,30 참조) 아버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시메온의 인내는 결국 하느님의 인내를 비추는 거울인 것입니다. 기도에서 그리고 자기 백성의 역사에서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인내로우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인내로 그분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려 하신다.”(로마 2,4)고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저는 로마노 과르디니를 상기시키기를 좋아하는데, 인내는 우리에게 변화될 시간을 주기 위해 우리의 나약함에 응답하시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그는 말합니다(Glaubenserkenntnis, Würzburg 1949, 28 참조). 그리고 특별히 시메온이 품에 껴안은 구세주 예수님은 하느님의 인내를 드러내 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불러 주시며, 완전함이 아니라 마음의 도약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이시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곳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시며,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을 때라도 우리 안에 숨통을 열어 주시고자 하시고 가라지를 뽑지 않고 좋은 곡식알을 자라게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희망의 동기는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결코 지치시는 일 없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지치시는 일 없이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희망의 동기입니다. 우리가 멀어지면 그분은 우리를 찾아 나서시고 우리가 땅에 넘어지면 우리를 일으켜 주시며, 우리가 길을 잃었다가 당신께로 돌아가면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 계산의 저울로 측량할 수 없고 우리에게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회복력과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르치십니다. 언제나, 날마다. 넘어진 후에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용기를요. 그분은 인내로우십니다.

 

우리의 인내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축성생활을 위해 하느님의 인내와 시메온의 인내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인내란 무엇인가? 물론, 단순히 어려움을 참는 것이나 역경을 운명론적으로 견디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인내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인내는 곧 우리로 하여금 짐을 질수 있게,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주는, 개인적·공동체적 문제들의 짐을 견디어 내게 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게 해 주고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때라도 선에 항구하게 해 주며 지루함과 무기력이 우리를 공격할 때도 계속 걸어가게 해 주는 혼의 꿋꿋함입니다.

 

저는 인내가 구체화되는 세 가지 자리를 가리키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입니다. 어느 날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씩씩하고 관대하게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쳐드렸지요. 그런데 살아가노라니 위로와 함께 우리는 실망과 좌절도 받게 되었습니다. 종종 우리의 일에 대한 열정에 기대했던 결과가 상응하지 못할 때도 있고 우리가 뿌린 씨가 적절한 결실을 내지 못할 때도 있으며 기도의 열성이 시들해지고 영적 메마름에 늘 면역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축성생활자들의 삶에서 무너진 기대 때문에 희망이 마모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내하고 신뢰로써 하느님의 때와 방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고 내면이 슬픔과 불신에 양보하는 일 없이 우리의 꿈을 다시 활기차게 해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축성된 사람들 안에 내적 슬픔은 벌레입니다. 안으로부터 우리를 먹어치우는 벌레예요. 내적 슬픔에서 벗어나십시오!

 

인내가 구체화되는 두 번째 자리는 공동체 생활입니다. 인간관계들은. 특히 삶의 계획과 사도적 활동을 함께 나누는 것일 때는, 항상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잘 알지요. 때로는 갈등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즉각적인 해결을 요구할 수도 없고 성급하게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평화를 잃지 않도록 하며 사랑과 진실 안에서 밝혀지도록 더 나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필요하지요. 폭풍이 혼란을 일으키도록 두지 말아야 합니다. 성무일도서의 독서[역주: 독서의 기도 제2독서]에 아름다운 대목이 하나 있어요. 내일 날짜 기도인데요. 영적 식별에 관한 포티케의 디아도쿠스의 아름다운 글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가 출렁일 때는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지만 바다가 잔잔할 때는 물고기들을 볼 수 있다.” 우리 마음이 동요하고 있고 조급할 때는 우리는 결코 좋은 식별을 할 수 없고 진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결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 상호 인내가 필요합니다. 견디기, 곧 형제나 자매의 삶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의 나약함과 결점도요. 모두가 그래야 합니다. 다음의 사실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솔리스트(독창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솔리스트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요. 아니에요. 솔리스트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합창단의 일원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때로는 음치를 하지만 항상 연습을 하고 함께 노래해야 하는 합창단원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자리세상에 대한 인내입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예언자들이 선포한 희망을 마음속에서 가꾸어 왔습니다. 비록 그 희망의 실현이 늦어지고 세상의 불충실과 폐허 가운데서 느리게 자라난다 할지라도요. 그들은 잘 풀려 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불평을 내뱉지 않고 역사의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빛을 인내로써 기다립니다. 자신의 공동체의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불평 안에 갇힌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는 이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의 대가들이고 불평의 박사들입니다. 불평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해요! 안 됩니다. 불평은 사람을 가둡니다.

세상은 우리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아요.” 이런 말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 “이제는 성소가 없어서 이 집을 닫아야겠어요.” “살기가 힘들어요.” 아이고, 저에게 그런 말 마세요! ”. 그렇게 해서 불평의 이중창이 시작됩니다. 때로는 역사의 땅에서 일하시는, 또 우리 마음의 땅에서도 역시 일하시는 하느님의 인내에 우리는 모든 것을 즉시 판단하는 사람의 성급함으로 맞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안 돼, 지금, 지금, 지금. 그렇게 우리는 작은”,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희망이라는 그 덕을 놓칩니다, 수많은 남녀 축성생활들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단순히 성급함 때문에요.

인내는 우리 자신을, 우리 공동체와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삶 안에 성령의 인내를 맞아들입니까? 우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등에 지고 형제적 삶의 기쁨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세상을 향해서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의 섬김을 계속해 나갑니까, 아니면 거칠게 심판합니까? 이것들은 우리의 축성생활을 위한 도전들입니다. 곧 우리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머물러 있거나 늘 해 오던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고 매일의 불평 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계속 걸어 나가고 새로운 길을 탐색하며 성령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권고하시는지를 찾는 용감한 인내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이런 일들을 겸손하게, 단순하게, 크게 떠들어 대지 않고, 거창하게 선전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내를 관상하고 시메온의 신뢰에 찬 인내를, 한나의 인내도, 간청합시다. 우리의 두 눈도 구원의 빛을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 빛을 온 세상에 전해 줄 수 있도록. 이 두 노인네가 찬미가를 부르며 그 빛을 전해 준 것처럼 말입니다.

 

 

미사 거행 후의 교종의 말씀

 

좀 앉아 주십시오.

 

추기경님의 말씀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분의, 모든 공동 집전자와 모든 참석자의 표현이지요. 여기 우리는 수가 많지 않습니다. 이 코비드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군요. 하지만 인내로 받아들입시다. 인내가 필요해요. 그리고 주님께 우리 삶을 봉헌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제 막 수련원에 들어간 그 행복한 젊은 수녀님이 맘 좋고 거룩한 나이든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지내기 어때요?” “여긴 천국이에요, 수녀님!” 젊은이가 그렇게 답합니다. “좀 더 기다리세요. 연옥이 있으니까.” 축성생활, 공동체의 삶은 연옥입니다. 그 삶을 살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지요.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부디 험담을 피하세요. 공동체 생활을 죽이는 것은 바로 험담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쉽지 않아요, 신부님. 어떤 때는 마음에서 올라오거든요!” 그래요, 마음에서 올라오지요. 그건 시기질투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대죄들에서 나온다고요. 피하세요. “하지만, 신부님, 말씀해 주세요. 무슨 약이 좀 없을까요? 기도, 선함?” 맞아요. 약이 하나 있죠. 집에서 만드는 담방약이에요. 혀를 깨무세요.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기 전에 혀를 깨무세요. 그러면 혀가 부어올라서 입안을 채우게 될 것이니 당신은 나쁜 말을 할 수 없을 거예요. 제발, 공동체를 파괴하는 험담을 피하세요!

 

그리고 또 공동체 안의 삶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하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제대로 되어 가지 않는 것이 언제나 많이 있지요. 장상에게서, 평의원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항상 있어요. 아닌가요? 유머 감각을 잃지 마세요, 부디. 이것이 큰 도움을 줍니다. 항험담제(험담을 막아 주는 약)이죠. 자기 자신에 대해,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좋은 마음으로 웃을 줄 아는 거예요. 유머 감각을 잃지 않기. 그리고 험담을 피하기.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하는 이것은 이를테면 지나치게 성직자다운 충고는 아니고 인간적인 거예요. 인내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적인 조언입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지 않기입니다. 혀를 깨무세요. 그리고 또 유머 감각을 잃지 않기. 이게 아주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분이 하고 계시는 일에 감사드리고 여러분의 증언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에, 여러분이 그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나아가시는 데 대해, 오지 않는 성소자들 앞에서 겪는 많은 고통에 대해 감사, 감사드립니다. 계속해 나가세요.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서는 더욱 크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주님 뒤를 따라갑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옮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