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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선악과'의 유혹_2월 13일 강론2021-02-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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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의 유혹


- 연중 5주간 토요일 조현철 신부 강론 

 

에덴동산이야기(창세 3,1-24)는 동산의 두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왜 구태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을까? 그것만 빼고 다른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는데. 문제의 발단은 사람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자의식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자의식은 놀라운 능력이지만, 동시에 비극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면, ‘인간 실존에 맞닥뜨립니다. 그렇게 마주 본 자신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불확실함, 일종의 결핍을 느낍니다. 이 결핍에서 불안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불안에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여기서 아주 치명적인 유혹이 생긴다고 들려줍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이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 ‘결핍을 제거하려는 충동입니다. 바로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하느님이 손대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것을 취하면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5)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완전해지라는 유혹입니다. 사람임을 거부하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완전함을 획득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창조된 그대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 내가 전능한 힘을 쟁취해서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을 제거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를 쟁취해서는 인간 실존의 결핍과 거기서 비롯하는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우리 힘으로 해보겠다고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한 결과는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관계의 훼손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관계의 존재이니, 관계의 훼손은 결국 죽음입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여 하느님의 관계를 깨뜨렸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이웃과 자연의 관계도 깨뜨렸습니다. 남자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먼저 하느님에게, 그다음에는 여인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탓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인간 실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 앞에서 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은 피조물의 본질인 유한성이며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유한성은 보시니 참 좋았다.” 했던 그 좋음의 일부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불완전과 불확실, 거기서 오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사람은 무엇으로 완전하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며 참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한없이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하느님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남자와 여자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으로 사람은 타자를 향한 가엾은 마음, 연민의 존재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가엾은 마음(연민)’입니다(마르 1,41).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르 8,2) 연민은 그리스어로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플랑크니조마이)’이며, 창자를 뜻하는 σπλγχνον(스플랑크논)’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민은 우리말로 애끓는 마음, 애간장이 타는 마음, 녹는 마음을 뜻합니다. 사람은 그런 연민을 지닌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연민을 실천함으로써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참사람인 이상, 예수님도 우리가 느끼는 그런 실존적 결핍과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결핍과 불안을 힘과 권력을 획득하여 메꾸고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가엾은 마음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때, 밖으로 쏟아낼 때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자녀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믿음을 따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할 때,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이라는 결핍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불안은 사라집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1요한 4:18) 불완전의 반대는 완전이 아니라 연민, 곧 사랑입니다.

 

내 안의 불안을 없앤다고 나 자신에게 아무리 집중해보아도, 나를 무언가로 자꾸 채운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안의 연민의 마음을 밖으로 쏟을 때 비로소 내 안의 불안이 사라지기 시작할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삶, 연민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초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초대는 바로 우리 자신의 완성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 초대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축복이 들어있습니다.

 

새해, 하느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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