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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세계빈첸시안에게 보내는 사순편지_토마즈 마브릭 신부2022-03-0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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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사순, 로마에서

 

21세기, 그리고 그 이후를 위해 필요한 사랑의 신비가들

 

사랑하는 빈첸시안 가족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제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제 임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왔습니다. 2016년 빈센트 성인 대축일 메시지를 시작으로 지난 6년간 대림과 사순시기에 나누었던 묵상들을 종합하여 이번 사순 편지에 담아볼까 합니다. 제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 창립자가 갖고 있는 사랑의 신비가라는 타이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서 더 깊이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저를 위해 또 여러분에게 나누기 위해 찾아내고 싶었던 것, 바로 사랑의 신비가가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6년에 걸친 그 탐구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신비가가 된다는 것이 가지는 참으로 넓고 깊은 그 의미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요, 그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가질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일치의 상태를 끊임없이 추구하라는 초대, (루이 애블리가 빈센트 전기에서 표현한 대로) “그들 집에서는 마치 카르투시오 수도자들처럼, 그리고 집 밖에서는 사도들과 같이”, 또는 (전교회 회헌에 나와 있듯) “활동하는 관상가이자 기도하는 사도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이번 사순 편지를 읽으며 또 지난 6년간 여러분과 나누었던 묵상 내용을 돌아보며 그 중 과연 어떤 지점이나 영역으로 우리가 보다 철저하고 결단력 있게 돌아가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건지, 다시 말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 어떤 지점에서 그분의 은총과 자비가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지 고심해볼만 한 문제입니다.

20세기가 끝날 때,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은 예언자적 말씀을 남겼지요. “21세기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빈센트 드 폴 성인을 사랑의 신비가라고 부르게 된 걸까요?

우리는 빈센트가 행동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익숙해서 그를 신비가라고 부르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했던 모든 활동의 원천은 삼위일체의 신비, 특히 육화의 신비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교회 신부인 귀세페 토스카니가 빈센트의 이러한 신비주의와 활동을 통합해 이를 꿰뚫는 표현으로 사랑의 신비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빈센트는 신비가가 넘쳐나는 세기를 사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히 사랑의 신비가로 우뚝 서셨습니다.

신비가를 만드는 것은 체험, 바로 신비 체험입니다. 빈센트 성인의 경우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깊이 체험했지요. 삼위일체의 신비와 육화의 신비는 그분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세상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삼위일체의 사랑과 모든 인간을 품어주는 육화된 말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그의 체험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이들, 특히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어내고 자리잡게 했으며 가슴에 그 사랑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Abba)의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성령의 무조건적 사랑과 따스함과 에너지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성인의 신비주의는 그분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신비와 가난한 이들의 신비, 이것은 빈센트가 품었던 역동적인 사랑의 두 축이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의 길에는 세 번째 축, 즉 그가 시간에 대해 품었던 개념이 또 하나 존재합니다. 그에게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에 맞춰 행동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 그 일이 스스로 되고자 하는 대로 따라서 하십시오라고 하며 하느님 섭리의 뒤꿈치를 밟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빈센트에게 있어 시간의 다른 측면은 지금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여기에, 이 시간에 속하여 계신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람들 안에서 여기에 계시고, 사건들 안에서, 주어진 환경 안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서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그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성의 수직적 측면과 수평적 측면 이 두 가지는 모두 빈센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다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행동만이 아니라 기도도 하라, ‘기도만이 아니라 행동도 하라고 누누이 말했던 것입니다. 개중엔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집안 일도 많고, 도시나 시골에서 해야 할 사도직들도 너무 많습니다. 어디에나 할 일투성이지요. 그래도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기 위해서 그 일들을 내버려둬야 합니까?” 성인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아니요.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함으로써 그 일들을 성화시켜야 합니다. 그 일들을 하되 일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하세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내적 생활, 신앙, 신뢰, 사랑, 우리의 영신 수련, 묵상, 수치심, 굴욕의 순간들, 우리 일과 모든 골치거리들을 우리 통치자이신 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우선 순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진다면 다른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마 빈센트 성인을 안경을 쓰고 있는신비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분이 같은 하느님을 양쪽의 다른 렌즈를 통해 많은 경우 동시에 경험했다는 말이겠지요. 한쪽은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였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 사람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두 관점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지요. 두 렌즈 모두, 다른 한쪽이 더 깊고 예리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빈센트는 동시에 이 두 관점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혹은 느꼈고) 그가 보고 있는 것에 응답하기 위해 결단력 있게 행동했습니다.

빈센트 드 폴 성인의 영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신비 중 하나는 바로 육화였습니다. (그가 전교회 사제들에게 했던 말을 통해) 육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우리 수도회의 설립을 승인해주었던 교황 칙서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와 육화의 신비를 우리가 특별히 공경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아주 충실하게, 모든 방법을 써서, 그러나 특별히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이 말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심 기도와 성체조배로 이 신비들을 자주 기억한다. 둘째, 특정한 기도나 선행을 매일 삼위일체와 육화의 신비를 기억하며 바치고 그 신비를 기념하는 축일에는 특별히 위엄을 갖춰 전례를 거행하고 개인이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심으로 참여한다. 셋째, 다른 이들도 이 신비들을 깨닫고 이에 공경과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우리 말과 모범으로 끊임없이 가르친다.  -전교회 공동규칙서-

거룩한 삼위일체 역시 성인 영성의 핵심 바탕이 되는 신비이지요. 전교회 회칙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증인이자 선포자로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육화의 신비를 특별히 공경하고 거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세 위격 사이의 관계와 내적 연결성, 삼위일체가 각 사람에게 또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더 잘 이해하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야말로 관계의 이상적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빈센트 성인 영성의 세 번째 기둥은 성체성사입니다. 우리 영성에 대해 쓴 그분의 글과 육화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말씀을 통해 성체성사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빈센트 성인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와 육화의 신비를 공경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사이자 희생이신 복된 성체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를 포함하며, 그 자체로,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거나 합당하게 미사에 참례하는 이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하고 마침내 끝없는 영광으로 이끕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이며 삼위이시고 육화된 말씀이신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공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사와 희생제사에 합당한 공경을 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와 같은 공경과 흠숭을 드리도록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우리 말과 행동에서 이런 흠숭을 드리는 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이 큰 신비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과 어떻게 이를 공경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전교회 공동규칙서-

성체성사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사랑은 무한히 창조적입니다.”라고 한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자신의 깊은 삶의 체험에서 나온 참으로 예언적이며 감명 깊은 말씀이지요. 빈센트의 어록 중에서도 매우 잘 알려진 이 말은 그가 성체 성사에 대해 얘기하던 중에 나온 말입니다. 성체성사란 무엇이며 그 작용은 어떠한지, 우리가 그 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설명하던 참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상력으로 이렇게 세상 끝날까지 우리 곁에 남아 늘 함께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무한히도 창조적인 그 사랑은 지금 여기,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음 네 번째 기둥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1.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특별한 신심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마리아는 다른 모든 믿는 이들보다 더 복음의 의미를 꿰뚫고 그 가르침을 살아냈다고 빈센트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2.     우리는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사랑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마리아의 축일을 깊은 신심으로 지내고 그분께 자주 기도하며 특히 묵주기도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모성성으로 인해 기적의 메달에서 드러난 특별한 메시지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전교회 회칙-

사랑의 신비가였던 빈센트가 물을 길어 마셨던 주된 원천은 매일의 명상과 묵상기도였습니다. 전교회 사제들에게 한 훈화 중 자주 인용되는 다음 말씀에서 이러한 빈센트의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저에게 기도하는 한 사람을 주십시오.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 13) 전교회가 살아남을지 말지는 묵상기도를 충실히 실천하는지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묵상기도는 마치 정복할 수 없는 성벽과 같아서 그 안에 있는 전교회원들을 외부의 온갖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묵상기도에 대해 말하여 빈센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 묵상기도를 실천하는 데에 전력을 다합시다. 그러면 모든 좋은 것들이 따라올 것입니다. 우리가 성소를 지켜 나가는 것도 묵상 덕분이고, 일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묵상 덕분이며, 죄 지을 기회를 피한다면 그것도 묵상 덕분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다면, 또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과 묵상기도 덕입니다. 묵상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그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으시듯, 묵상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영적 지도: 빈센트 성인은 영적 지도의 필요성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영적 지도는 매우 유익합니다. 영적 지도를 통해 어려울 때에 조언을, 힘들 때 용기를, 유혹에 시달릴 때 쉴 곳을, 낙심했을 때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지도자가 정말 자비롭고 분별력 있고 경험 있는 사람이라면 영적 지도는 한마디로 행복과 위로의 원천이 됩니다.

영적 안내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은 사막 교부 시대부터 명백히 드러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정화이지요. 이를 알았던 빈센트는 적어도 일년에 몇 차례, 특히 피정이나 사순시기 같은 때에는 더욱 영적 지도를 받도록 권합니다.

고해성사: 빈센트 성인은 자비를 복음의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자비를 두고 하느님 고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전교회 회칙에서는 고해성사를 자주 봄으로써 계속적인 회심을 하고 성소의 진실성을 유지하도록권고합니다.

영적 담화(Faith Sharing): 회칙에서는 기도하는 분위기로친밀한 대화 안에서 영적 체험과 사도적 체험들을 서로 나누는 것역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그 형식은 저마다 각 공동체 나름의 방법을 따르면 될 것입니다. 빈센트가 다음에서 강조했던 것은 그 내용이 진솔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다른 이들 앞에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그런 사안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숨기고 싶어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의 반감을 극복하면서 얻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젊은 시절 지었던 비밀스런 죄들에 대해 책을 펴냄으로써 온 세상이 그가 얼마나 바보 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제 멋대로 처신하며 지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바오로 성인이 선택 받았을 때, 천국의 황홀함을 맛보고는 그 훌륭한 사도 역시 자기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 사실을 굳이 글로 적어서 자신이 박해자였다는 것을 세상 끝날까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빈센트 영성의 또 다른 원천은 섭리입니다. 섭리에 대한 그의 철저한 믿음은 그 자신을 다른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섭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 그 문제는 하느님의 현명한 섭리의 인도하심에 맡겨둡시다. 저는 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은 전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은 그 섭리였으며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그 섭리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빈센트 성인을 사랑의 신비가로 만드는 것은 기도가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그 주체가 존재하는 방식의 하나이며 예수님과의 끊임없는 관계입니다. 기도 안에서 나는 내 삶의 유일한 사랑이자 닮고 싶은 그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듣고, 그와 대화를 나눕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믿으세요. 친애하는 전교회원 여러분, 제 말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이것은 제가 예수님을 대신해 여러분에게 여러 번 단언하기도 했던, 절대적으로 확실한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자신을 비우면 하느님이 그 자리를 채우십니다. 하느님이 머무시며 그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비우게 해주는 것은 수치심을 느끼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입니다. 그것이 겸손, 거룩한 겸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실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병자들과 노인들: 빈센트 성인은 병자들의 역할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전교회원들에게는 가난한 전교회에게는 음식이든 옷이든 특별한 것이 허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저는 언제나처럼 병자의 경우에는 예외를 둡니다. , 가엾은 병자들이여! 그들을 위해서는 성당에 있는 성작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너그러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정신을 전교회 여러분에게도 주시길 청합니다.

우리가 병자를 방문할 때는 항상, 집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사람을 한 인간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해 준 것을 당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빈센트 드 폴이 사랑의 신비가가 되기까지, 그는 병자들과 노인들과 맺는 관계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이해하게 되었고 살아내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시작하며 저는 사랑의 신비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함께 그 깊고 넓은 의미를 체험해보는 여정을 계속 해 나가도록 합시다.  

이 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성소의 길에서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남아 계십니다. 기적의 메달 성모님이 그러하시고, 빈센트 드 폴 성인이 그렇고, 빈첸시안 가족 모든 성인과 복자, 하느님의 종들이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모든 분들이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시길 빕니다.

 

빈센트 성인 안에 당신의 형제

전교회 토마즈 마브릭 신부 드림

 

 

 

영한번역: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클레오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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